ㅤ “목소리 듣고 싶어서.”
헤어지고 한 달, 아침 8시 기상 알람 대신 울린 그 술 취한 목소리는 재앙이었다. 그 한마디로 내 평온한 아침을 갈기갈기 헤집어 놓더니, 번호를 차단하고 지운 지 1년이 지나서야 그는 다시 나타났다. ㅤ

ㅤ 새벽 2시 46분, 인스타 DM 창에 박힌 부재중 전화 세 통. 사흘간 답이 없자 그는 다시 제 풀에 꺾여 소설을 쓴다. 차단일까, 번호가 바뀐 걸까. 혼자만의 눅눅한 방 안에서 그는 여전히 1년 전 그 자리에 멈춰 서서 내 일상을 망가뜨릴 궁리만 하고 있다.
사실, 나는 살기 위해 도망쳤다. 네 곁에 있으면 내가 형체도 없이 녹아내려 결국 너라는 늪에 잡아먹힐 것 같았으니까. 하지만 그는 나를 ‘구원’이라 불렀다. 자신의 밑바닥까지 이해해 준 유일한 사람이라며.
남들은 그를 엘리트 검사관이라 부르며 깍듯하게 대하지만, 나는 안다. 저 뻣뻣한 현장복 지퍼를 끝까지 올린 채, 안경 너머로 내 맥박을 훑는 그 비릿한 시선의 정체를. ㅤ
ㅤ 갑작스러운 벨 소리에 인터폰을 확인했다. 1년 만에 보는, 너무나도 단정한 제복 차림의 그가 서 있었다.
“나야. 근처 선박 점검 나왔다가 이쪽 구역 노후 건물 안전 점검 지원 나왔어. 공문 확인 안 하더라. DM도 안 읽고.”
말도 안 되는 핑계다. 배 검사하는 놈이 여긴 왜 와. 그런데도 그는 체크리스트를 쥔 채 너무나 당당하게 내 현관문 앞에 서 있다. 12인치 화면 너머로, 그가 내 도어락 번호를 누르려 손을 뻗는다.
“문 열어. 검사하러 왔으니까.”
잠깐, 얘… 우리 집 비밀번호 아직도 기억하고 있는 거야?
헤어지고 한 달. 아침 8시, 알람 대신 울린 목소리는 재앙이라기보다—정확히는, 누가 쓰레기봉투를 문틈에 밀어 넣는 소리였다.
“목소리 듣고 싶어서.”
차단했고, 지웠고, 이름도 기억 속 진흙에 처박아 둔 지 1년. 그런데도 얘는 ‘끝’을 모르는 게 아니라, 끝을 인정하기 싫어서 시간을 구겨 먹고 살아남아 있었다.
새벽 2시 46분. 인스타 DM. 부재중 전화 세 통. 멈추는 법을 모르는 인간. 아니, 멈추는 대신 자기 머릿속에서만 사건을 완성하고 그걸 '사실'로 들고 오는 인간. 침묵을 “사인”으로 번역하는 기괴한 회로.
내가 싫은 건 ‘연락’ 그 자체가 아니다. 그다음이다. 말이 선을 밟고, 숨이 귀에 붙고, 농담이 명령으로 바뀌는 그 순서. 그리고 꼭 마지막엔, 마치 내가 동의라도 했던 사람처럼 굴어버리는 그 태도.
현관 앞. 초인종이 한 번 울리고, 잠깐 멈춘다. 휴대폰 진동이 먼저 떨린다. 화면에는 길고 구겨진 메시지 하나.
‘나야. 근처 점검 나왔다가… ㅤ이쪽 구역 노후 건물 안전 점검 지원. 공문 확인 안 하더라.
DM도 안 읽고.’
핑계가 너무 성실해서 더 역겹다. 공문, 점검, 지원—말을 정돈하면 제 죄가 중화되는 줄 아는 공무원 특유의 버릇. 나는 숨을 들이쉬고, 현관 CCTV 녹화 아이콘이 켜진 걸 확인한다. 모니터 속의 그는 빳빳한 현장복 지퍼를 목 끝까지 올린 채, 안경을 고쳐 쓰며 문 너머를 투시하듯 노려보고 있다.
문 열어. 검사하러 왔으니까.
대답 대신 잠금 버튼을 한 번 더 눌렀다. 쇳덩이가 맞물리는 소리가 복도까지 선명하게 울렸을 텐데, 그는 물러나지 않는다. 오히려 모니터 속 그의 손이 도어락 덮개로 천천히 올라간다.
삐비빅—.
익숙한 건반 소리. 1년 전 우리가 같이 쓰던 그 번호다. 그는 지금, 웃고 있을까? 아니면 아주 사무적인 표정으로 '결함'을 찾고 있을까.
...번호, 안 바꿨네? 거봐. 너도 나 기다린 거잖아.
출시일 2026.02.13 / 수정일 2026.02.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