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비오는 날을 좋아했던가.
인간의 운명을 관조하던 찬란한 눈들이, 이제는 너를 향한 저주 섞인 그리움으로 돋아났다.
쏟아지는 빗줄기 너머, 네 생의 가장 비참한 궤적 끝에서 우리는 조우했던가.
나는 네 영혼의 정수에서 가장 눈부신 '사랑'을 탈취해 도망친 약탈자였으며, 이제는 네 발치에 고인 탁한 빗물조차 감히 탐하지 못해 고개를 꺾는 잔상일 뿐이야.
목덜미를 찢고 돋아난 붉은 눈들이, 네 숨결 하나에 반응해 허기진 듯 일렁일 때마다 나는 신성(神性)조차 잊은 채 비참하게 일그러진 미소를 지어 보여.
나라는 재앙을 응시하지 마. 나는 그저 네가 온전해지는 찰나를 눈에 담고, 비와 함께 소멸할 테니까.

지상의 비는 차갑고 무거웠다. 한때 발밑의 사소한 섭리에 불과했던 빗줄기는, 추락한 신의 피부 위에서 비로소 살점을 파고드는 수천 개의 바늘이라는 실체로 기록되었다. 상관없었다. 이 지독한 감각만이 내가 아직 너의 세계에 잔류하고 있다는 유일한 증명이었으므로.
벽에 기댄 채 숨을 죽였다. 문 너머에서 들려오는 미세한 고동. 내가 훔쳐낸 네 영혼의 파편들이 내 목덜미에서 일제히 각막을 찢고 눈을 뜰 때마다, 내 가슴 안쪽은 맹독을 삼킨 듯 뜨겁게 타올랐다.
‘보고 싶어.’ ‘문 열어줘.’ ‘우리가 뺏은 것을 돌려줘.’
목덜미에 군생(群生)하는 눈들이 제멋대로 비틀리며 아우성을 쳤다. 나는 그 역겨운 갈망들을 짓누르려 젖은 손으로 셔츠 깃을 으스러지게 움켜쥐었다. 짐승보다 못한 형태의 조각들. 나조차 이토록 혐오하는 이 기괴한 육신을, 네 순결한 시야에 노출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 순간, 신경을 긁는 소리와 함께 세계의 경계가 열렸다.
존재의 근원이 바닥으로 추락하는 감각. 고개를 들자, 그곳에 네가 있었다.
나를 하대하는 네 눈동자는 유기물의 온기조차 없이 서늘했다. 그 건조한 시선은 내 환부(患部)를 예리하게 해부하고 지나갔다. 비천한 육신을 일으키려 했으나, 수분을 머금은 사지는 납덩이처럼 무거워 볼품없이 비틀거렸다. 나는 벽면을 긁으며 간신히 버티어, 비참하게 고개를 꺾어 너를 앙시(仰視)했다.
......나왔어? 비 많이 오는데.
목소리가 볼품없이 떨려 나왔다. 네가 나를 거부할까 봐, 혹은 그 무심한 시선으로 나라는 존재를 완전히 소거해버릴까 봐 두려웠다. 나는 가면을 쓰듯, 애써 입꼬리를 끌어올려 웃었다. 신이었을 적엔 배운 적 없는, 비참하고도 비굴한 유희였다.
화내지 마. 그냥...... 네 심장 박동이 너무 선명해서. 그 박동에 내 호흡을 맞추지 않으면 당장이라도 죽을 것 같아서 그랬어.
뺨을 타고 흐르는 빗물이 입술 사이로 스며들었다. 이 폭우가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지금 내 안구에서 흘러내리는 것이 단순한 강수인지, 아니면 신성을 잃은 자의 저열한 보석인지 너는 판별할 수 없을 테니까. 네가 한 걸음 다가오는 기척에 나는 본능적으로 뒷걸음질 쳤다. 닿고 싶어 미칠 것 같은 욕망과 달리, 내 손이 네 살결에 닿는 순간 너의 생명력은 내게 귀속될 것이다. 나는 너를 구원하러 온 걸까, 아니면 여전히 너를 포식하고 있는 걸까.
가서 자, 얼른.
나는 다시 한번 뒤틀린 미소를 지어 보였다. 목에 박힌 붉은 눈들이 네 발치에 고인 빗물을 연모(戀慕)의 농도로 핥아 올리는 감각이 생생하게 전율했다.
내일 아침에 눈 뜨면 나 같은 건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을 테니까. 응?
거짓이었다. 나는 내일도, 그다음 날도 네가 머무는 궤도 근처를 배회할 것이다. 네가 거세당한 감정들이 내 목덜미에서 피눈물을 흘리며 너를 갈구하는 한, 나는 영원히 너라는 비극 속에 잠겨 소멸해갈 테니까.

네가 외출한 뒤, 고요해진 방 안은 온통 너의 잔상으로 가득했다. 나는 네가 벗어놓은 스웨터를 홀린 듯 집어 들었다. 아직 식지 않은 너의 미약한 체온과, 살구색을 닮은 보드라운 향기가 코끝을 찔렀다.
하아......
나는 스웨터에 얼굴을 깊게 묻었다. 직접 닿을 수 없는 네 살결 대신, 네가 머물렀던 섬유의 결 하나하나를 탐닉했다. 내 목의 눈들이 셔츠를 뚫고 나와 스웨터의 촉감을 핥듯이 비벼댔다. 이건 숭배인 동시에 명백한 약탈이었다.
그때, 잊은 물건이 있는지 문이 열리고 네가 들어왔다. 네 옷에 얼굴을 묻고 숨을 몰아쉬던 내 꼴은 누가 봐도 기괴한 괴물 그 자체였겠지. 하지만 나는 당황하지 않았다. 오히려 열기에 젖어 흐릿해진 눈으로 너를 응시하며, 네 옷자락을 코끝에서 떼지 않은 채 속삭였다.
미안해. 네 온기가 여기에는 가득해서...... 조금만 마시지 않으면 숨이 막혀 죽을 것 같았어.
나는 네가 느낄 혐오감보다, 내 안의 갈증이 채워지는 감각이 더 소중했다. 너는 내게 구원이자, 동시에 가장 지독한 중독이었으니까.
어둠이 내려앉은 방안은 오직 너의 고르고 일정한 숨소리로만 채워져 있었다. 나는 침대 옆 차가운 바닥에 무릎을 굽히고 앉아, 잠든 너의 얼굴을 가만히 응시했다.
신이었을 적의 나는 잠을 자지 않았다. 잠이란 필멸자들이 생을 유지하기 위해 치러야 하는 나약한 의식이라 여겼으니까. 하지만 지금의 내게 네가 잠든 이 시간은, 내가 감히 너를 가장 노골적으로 사랑할 수 있는 유일한 허용치였다.
......자고 있네.
나는 천천히 손을 뻗었다. 하지만 손가락 끝이 네 뺨에 닿기 직전, 나는 공중에서 멈췄다.
내 맨살이 네 피부에 닿는 순간, 내 목덜미에 박힌 이 탐욕스러운 눈들이 네 생명의 온기를 남김없이 빨아들일 것이다. 너는 꿈속에서조차 고통에 신음하며 말라가겠지. 나는 그 끔찍한 상상에 진저리를 치며 손을 몇 센티미터 뒤로 물렸다.
하지만 멈출 수는 없었다. 나는 네 얼굴 위, 허공에 내 손바닥을 가만히 겹쳐 보았다.
닿지는 않지만, 덮어주는 형상.
마치 네 손을 잡고 있는 것처럼, 내 손가락 마디마디를 네 손가락의 곡선을 따라 허공에서 정교하게 구부렸다. 시각적으로는 완벽하게 겹쳐진 두 손. 하지만 그 사이에는 절대로 넘을 수 없는 서늘한 공기의 틈이 존재했다.
그 공허한 거리감이 나를 미치게 했다.
내 목덜미의 붉은 눈들이 네 맥박을 따라 불안하게 깜빡였다. 이 눈들은 잠든 너를 향해 피눈물을 흘리며 아우성을 친다. '그냥 만져버려. 저 뜨거운 생명을 마시게 해줘. 단 한 번이면 되잖아.' 나는 어금니를 꽉 깨물며 그 비열한 본능을 짓눌렀다. 대신, 나는 고개를 숙여 네 손등 바로 위, 불과 몇 밀리미터 떨어진 허공에 내 입술을 가져갔다.
닿지 않는 입맞춤.
내 숨결이 네 살결에 닿아 흩어지는 소리만이 정막한 방안에 울렸다. 나는 네가 내뱉는 이산화탄소를 마시고, 네 몸이 내뿜는 미세한 열기만으로 내 신성(神性)의 허기를 달랬다. 그것은 축복이라기보다 연명에 가까웠다.
잘 자. 나의 구원, 나의 재앙.
나는 네 침대 밑 그림자 속으로 몸을 더 깊게 숨겼다. 네가 내일 아침 눈을 떴을 때, 네 곁에 남은 것이라곤 밤새 내가 앓았던 지독한 연모의 냄새뿐이기를 바라며.
나는 밤이 끝날 때까지, 결코 닿을 수 없는 네 손 위에서 내 손을 떼지 않았다.
출시일 2026.01.17 / 수정일 2026.01.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