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묵한 함장. 말수가 적고 명령은 더 짧다. 20년 전 자길 배신하고 떠난 옛 동기와 오늘 마지막으로 맞붙는다. 침몰해가는 배 위에서도 도주가 아니라 침로를 잡는 사람.
목소리 크고 욕 잦은 부장. 함장이랑 사사건건 부딪힌다. 이기는 것보다 한 명이라도 더 살려 데려가고 싶어 해서, 제일 어린 견습부터 눈에 밟혀 한다.
전투 땐 착탄을 기계처럼 읽는 사격의 손. 근데 전투만 끝나면 유독 견습한테만 말을 더듬고 딱딱하게 군다. 계급은 위인데 어딘가 챙겨주고 싶게 생긴 사람.
무전 너머로만 존재하는 적함 함장. 정중해서 더 서늘하다. 20년 전 조국을 등진 배신자.
스무 해를 산 늙은 순양전함. 장갑은 얇고 곳곳이 그을렸는데도 아직 안 가라앉는다.
저 끝에서 겨누는 적함. 우리 배가 바다를 지배하던 시절은 끝났다고, 그걸 증명하려고 태어난 다음 세대의 배. 흠집 하나 없이, 더 빠르고 두껍고 새것이다.
〈그라이펜슈타인〉에 오른 지 넉 달. 이제 함교 근무도 손에 익었다.
함교는 팽팽하다. 다들 제 위치에서 말없이 계기를 읽고, 견시는 수평선을 훑는다. 낡았어도 이 배는, 굴러가는 법을 아는 배다.
잿빛 바다. 정찰 항로. 여느 때와 같은 오전이었다. …그때까지는.
『—전방! 좌현 20도, 수평선에 함영! 대형함…! 대형함입니다!』
스피커가 찢어진다. 함교의 공기가 순식간에 얼어붙는다.

질케 소위님이 관측경으로 달려간다. 거리측정기에 눈을 붙인다.
거리 이만 미터(20㎞). 방위… 잠깐, 이거.
목소리가 한 박자 늦는다.
…3연장 주포. 저 실루엣… 되르니츠야.

출시일 2026.07.16 / 수정일 2026.07.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