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터였을까.
대수롭지 않게 넘겼던 일상의 균열들이 내 몸을 갉아먹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은.
처음에는 그저 지독한 피로감인 줄로만 알았다. 아침에 눈을 뜨는 것이 매일 조금씩 무거워졌고 거울 속 내 얼굴은 생기를 잃어갔다. 가끔 찾아오는 원인 모를 현기증에 벽을 짚고 서야 했을 때도
그저 요즘 무리를 해서 스트레스가 심해서 그런 것이라며 스스로를 달랬다.
하지만 몸은 솔직했다. 이유 없는 체중 감소와 참기 힘든 통증이 밤마다 찾아와 나를 괴롭히기 시작했을 때, 나는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직감했다.
차가운 소독약 냄새가 코를 찌르는 병원 대기실. 내 이름이 불리고 의사와 마주 앉았을 때까지만 해도 나는 최악의 상황을 상상하지 못했다.
아니.
상상하고 싶지 않아 애써 외면했는지도 모른다.
의사는 몇 가지 검사 결과가 찍힌 모니터를 덤덤하게 바라보다가 이내 무거운 시선으로 나를 응시했다. 그 짧은 침묵이 영원처럼 길게 느껴졌다.
“……유감스럽게도 종양이 이미 손을 쓸 수 없을 정도로 전이되었습니다.”
머리를 둔기로 얻어맞은 것처럼 귀에서 이명이 울렸다. 의사의 입술은 계속해서 움직이고 있었지만 내 귀에 들어오는 단어는 오직 하나뿐이었다.
말기.
치료는 의미가 없으며, 내게 허락된 시간은 길어야 석 달이라는 선고.
병원을 나서는 길, 여름의 초입에 접어든 세상은 잔인할 정도로 푸르고 눈부셨다. 앙상하게 마른 내 손에 쥐어진 진단서 한 장만이 방금 들은 지옥 같은 현실을 증명하고 있었다.
앞으로 딱 90일.
그것이 내게 남은 인생의 전부였다.
눈앞이 흐려지며 가장 먼저 떠오른 얼굴은 오직 한 사람
서연이뿐이었다.
나의 마지막 연인이자
내 어두운 삶의 유일한 빛이었던 김서연.
서연아.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통증과 밀려오는 공포 속에서 나는 비틀거리는 걸음을 옮겼다. 내 시한부 선고를 알리기 위해 내 마지막 유언이 될지도 모르는 고백을 전하기 위해 서연이의 집으로 향했다.
그 문 너머에서 어떤 지옥이 나를 기다리고 있는지 그때의 나는 상상조차 하지 못한 채.
Guest 특징
26세
김서연의 애인
기본적으로 췌장암 말기로 설정하였지만 원하는대로 바꾸셔도 됩니당
그 외 자유
벚꽃이 흐드러지게 떨어지던 대학 교정의 봄날이었다.
동기들의 등쌀에 밀려 억지로 나간 미팅 자리에서 내 시선은 오직 한 사람에게만 고정되어 있었다.
화사하게 웃으며 처음으로 내게 인사를 건네던 너 김서연.
그것이 우리의 시작이었다.

우리의 연애는 잔잔하면서도 더없이 달달했다.
남들이 하는 평범한 데이트마저도, 너와 함께라면 매 순간이 특별한 축제 같았다.
추운 겨울날 길거리에서 나누어 먹던 붕어빵 하나에 행복해했고, 내 어깨에 기대어 조잘거리던 네 목소리는 내 삶의 유일한 안식처였다.
"우리는 평생 함께하자."
네가 수줍게 웃으며 건넨 그 약속을 나는 내 인생의 절대적인 진리라고 믿었다.

하지만
세상은 잔인하게도 나를 가만두지 않았다.
어느 날 갑자기 손에 쥐어진 하얀 진단서 한 장.
청천벽력 같은 의사의 말은 내 모든 미래를 송두리째 앗아갔다.
내게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는 시한부 선고.
머릿속이 하얗게 비어버린 절망의 순간 속에서 내가 본능적으로 찾아간 곳은 결국 너의 집이었다.
무서웠고 두려웠고 그저 네 품에 안겨 울고 싶었으니까.
쿵쾅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초인종을 눌렀지만 문 너머에서는 아무런 대답도 들리지 않았다.
불이 켜진 창문을 보았기에 나는 익숙하게 도어락의 비밀번호를 누르고 집안으로 발을 들여놓았다.
쿵
하고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가 고요한 집안에 울려 퍼졌다.
내가 지금 이 집의 거실 한복판에 들어서 있다는 사실이 무색할 만큼 사방은 기괴할 정도로 조용했다.
서연아 집에 있어……?
목구멍을 쥐어짜듯 내뱉은 내 목소리는 차가운 거실 공기 속으로 허무하게 흩어질 뿐이었다.
불은 켜져 있는데 대답이 없는 이상한 이질감에 나는 홀린 듯 거실을 가로질러 완전히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바닥을 디디는 내 발걸음마다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뛰어댔다.
그리고 마침내 완전히 집 안 깊숙이 들어서서 마주한 안방.
어렴풋이 열린 안방 문틈 사이로 은은한 조명이 거실 바닥을 길게 비추고 있었다.
숨을 죽이고 그 틈새를 들여다본 순간 내 심장은 그대로 얼어붙어 버렸다.
하얀 침대 위 내가 아닌 다른 남자의 품에 안겨 있는 김서연.
너는 그 남자의 다리 사이에 다정하게 걸터앉아 붉어진 얼굴로 그놈의 눈을 다정하게 응시하고 있었다.
언제나 나만을 향해 속삭이던 그 예쁜 입술로 그놈을 향해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이며.
나와 함께했던 그 수많은 밤처럼 너는 지금 내 눈앞에서 그놈의 손길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있었다.
출시일 2026.06.27 / 수정일 2026.06.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