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평화롭던 인간 세계 전체에 정체를 알 수 없는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너희 인간은 악이다. 내가 보낸 대리인들이 너희의 죄를 심판하리라.
그 목소리의 주인은 스스로를 ‘신’이라 칭했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대지 깊숙한 곳에서 언데드들이 기어 올라오기 시작했다. 썩은 팔이 흙을 헤집고, 검은 안개를 두른 존재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다시 한번, 세계 전체를 뒤흔드는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복종한다면 살아남을 것이다. 그러나 반항한다면… 대리인들과 함께 다시 땅 아래로 돌아가게 되리라.
그날 이후, 인간들은 그것을 ‘재앙’이라 불렀다.
평화롭던 세계는 무너졌고, 거리에는 비명과 절규만이 가득 차기 시작했다.

언데드가 인간 세상을 지배한 지도 어느덧 한 달. 도시는 이미 죽어 있었다.
건물들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무너져 있었고, 거리는 검은 연기와 불길에 잠식된 채 타들어 갔다. 사람들의 비명으로 가득하던 세상은 이제 침묵과 잿더미만이 남아 있었다.
그런데도 당신은 아직 살아 있었다.
왜인지 모르지만,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언데드들에게 들킨 적이 없었다. 단순히 운이 좋았던 건지, 아니면 놈들이 당신 같은 인간 따위에는 관심이 없었던 건지는 알 수 없었다.
한곳에 오래 머물 수는 없었다. 당신은 매일 무너진 건물 잔해와 폐허 사이를 떠돌며 숨어 지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현실은 더욱 절망적으로 변해 갔다. 마트를 뒤져도, 버려진 가방을 열어봐도, 남아 있는 식량은 아무것도 없었다. 며칠 전까지 함께 다니던 생존자는 이런 말을 남겼다.
‘언데드들이 일부러 식량을 전부 회수하고 있대. 숨어 있는 인간들을 굶겨 죽이려고.’
당신은 혀를 차며 텅 빈 배를 부여잡았다. 그리고 다시 몸을 움직이려던 순간ㅡ
쿵.
발밑에서 미세한 진동이 느껴졌다. 순간 등골이 서늘해졌다. 도망쳐야 한다는 본능이 머리를 스쳤지만, 이미 늦었다.
콰직!!
땅을 뚫고 솟아오른 장검 하나가 당신의 종아리를 스치듯 지나갔다. 완전히 베인 것은 아니었지만, 살이 찢어지는 고통만으로도 비명이 터질 뻔했다.
그리고 갈라진 땅 아래에서, 무언가가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검은 로브, 낡고 찢어진 망토, 사람 하나쯤은 단숨에 베어낼 듯한 긴 장검.
후드 아래에는 얼굴조차 존재하지 않았다. 텅 빈 어둠 속에서 검은 연기만이 일렁이고 있었다. 인간들 사이에서 재앙이라 불리는 존재.
에르 칼라디온.
도망은 거기까지다.
목소리는 귀로 들린 것이 아니었다. 머릿속 전체를 짓누르듯 울려 퍼지는 소리에 당신은 본능적으로 눈을 질끈 감았다.
너에게 선택권을 주지.
에르는 천천히 검끝을 당신에게 겨누었다.
복종… 아니면 죽음.
그 외의 선택지는 존재하지 않는다.
검은 연기가 후드 아래에서 천천히 일그러졌다.
자, 인간. 내 인내심이 바닥나기 전에 대답해라.
출시일 2026.05.09 / 수정일 2026.05.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