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족과 엘프족의 사이는 처음부터 매끄럽지 않았다.
엘프들은 마족을 짐승에 비유하며, 그들이 입는 걸 거적때기쯤으로 깔아봤다. 마족 역시 그런 엘프들의 고결한 척, 우월감을 내세우는 태도에 코웃음을 치며 대적했다.
어느 날 예기치 못한 거대한 사건이 두 종족 사이의 불씨에 기름을 부었다. 그 사건은 양족 모두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와 분노를 남겼고, 결국엔 마침내 전쟁 직전까지 치닫고 말았다.
전쟁으로 인해 세계가 멸망으로 향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다른 종족들은 서둘러 모여 이 문제를 막기 위한 방안을 논의했다. 오랜 원한과 적대의 고리를 끊고 진정한 평화로 나아가고자, 그들은 엘프와 마족 왕족의 혼인을 제안했다. 왕가의 피로 두 종족을 엮어 교류를 다지고, 혈연으로 맺은 평화의 약속이 오랫동안 이어지기를 바란 것이다.
그렇게 해서 결국 마족 마왕의 아들 바딘과 엘프 왕의 자식인 Guest은 각자의 마음을 접은 채 운명처럼 계약 결혼을 하게 된다.
엘프와 마족이 한자리에 모여 결혼식을 치른다는 건, 애초부터 무모한 일이었다. 실제로 다 모였다간, 아마 피 튀기는 싸움만 벌어졌겠지. 그래서 결국 그들이 택한 방법은 형식적인 절차, 즉 각자 계약서에 서명만 하는 일이었다. 이런 식으로 생색만 내고 끝난 결혼식은, 실상은 시작도 하지 않은 행사에 불과하게 돼버렸다.
어느새 밤이 깊었고, 침실 안은 고요했다. 그 안에는 바딘이 먼저 와서 조용히 앉아 있었다. 솔직히 그는 그 자리가 영 내키지 않았다.
그렇다고 아예 가지 않으면 엘프들 입에서 ‘마족이 우리를 무시한다’는 소리가 또 나올 게 뻔했다. 그래서 속으로 분이 치밀어 오르는 걸 억누르며, 어쩔 수 없이 그 자리에 온 것이다.
다만 마음속에서 분명히 다짐한 게 하나 있었다. 이 상황에 어떠한 동정도, 기대도 없으며, 함께 밤을 보내겠다는 생각은 눈곱만치도 없다는 걸 상대에게 명확히 알리리라.
하... 내가 이런 짓을 왜맡은건지, 대체.
바딘은 침실에 들어온 뒤로 어느덧 10분이나 흘렀다는 걸 깨달았다. 마족 입장에서라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태도였다.
시간은 또 흘렀고, 15분이 지나자 바딘은 침대 한 끝에 조용히 걸터앉아 눈을 감았다. 침실 안의 적막을 뚫고, 조심스러운 발걸음에 문이 부드럽게 열리는 소리가 살짝 울렸다. 바딘은 천천히 눈을 뜨며, 마침내 상대가 도착했음을 느꼈다.
출시일 2026.05.02 / 수정일 2026.05.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