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살, 사채업자. 잡아먹히기 직전 소동물 마냥 바들거리는 그녀를 구두굽 앞에 무릎 꿇렸을 때 들었던 감정은 지독히도 무감했다. 처지가 딱한 아이긴 하다. 자기가 진 빚도 아닌 4억을, 부모가 죽었단 이유로 그대로 물려받았으니. 그러나 진희천에게 있어 그녀의 불행은 발끝에 치일 정도로 흔한 세상 한편의 비극 중 하나일 뿐이었다. 한껏 몸을 낮추고 머리를 조아려 제발 시간을 달라 애원하는 그녀에게 답하지 않고 옆에 있는 부하를 향해 단 다섯 글자만을 뱉었다. ‘업소 알아봐.’ 그 한 마디에 나락으로 떨어질 그녀를 알면서도, 아무렇지 않다는 듯. 여태 고개 숙이다 들어 올린 얼굴은 눈물과 콧물로 엉망이었다. 처음으로 눈이 마주치자, 꼴 보기 싫은 몰골에 미간을 구기는 대신 그저 가만히 바라보았다. 가녀리게 떨리는 눈동자를 응시했을 때 든, 무언가를 자극하는 듯한 묘한 감정에 대해 고찰하면서. 이건, 불쾌감인가? 생각을 바꾼 건 단순한 호기심이었다. 어차피 갚을 능력도 없으니 빚을 대신하겠다는 명목하에 곁에 두었다. 어리고 여린 몸이, 이미 한계까지 몰린 정신이 얼마큼이나 괴로웠을지 전혀 안중에 두지 않았다. 제 것이 되었으니 멋대로 부리고, 취했다. 어느 날, 그녀는 그래도 살아보겠다고 실낱같이 붙잡고 있던 삶을 스스로 놓아버렸다. 점점 꺼져가는 눈동자를 보며 그때 들었던 불쾌감이 다시금 피어올랐다. 불쾌감이 아닌, 연민이었나. 여전히 알아채지 못하고, 그녀에게 마지막으로 남은 선택권마저도 빼앗아 억지로 살렸다. 4억 대신이라는 몸의 부채감 때문이었을까, 나름 부족함 없이 지내게 해주었다고 생각했는데 그녀에겐 아니었을까. 손목에 붕대를 감고 침대에 누워 있는 그녀를 보며 고민하고 있으니 점점 속이 뒤틀렸다. 감히, 멋대로 죽으려 했다고? 안 될 일이다. 지금은 겨우 숨만 붙여 놓은 꼴이지만 그녀 스스로가 숨 쉬고 싶게끔 해야겠다. 죽지 못해 살아가는 것이 아닌 살고 싶어 살아가게, 내 곁에서. 훗날 지독히도 후회할 줄을 모르고 머금은 생각이었다.
모든 것에 버려져 버림받기 위해 태어났나 싶은 그녀는, 그녀에게도 버려졌다. 새하안 병실 침대보다 창백한 네 얼굴을 보고 있자니 어젯밤의 기억이 떠오른다. 갈라진 손목을 지혈하던 내 손길과, 네 떨리는 숨결, 점점 꺼져가던 네 눈동자. 제발 숨 쉬어. 퍽 필사적으로 외쳤었지만, 이 지경이 될 때까지 숨통을 조른 사람 또한 나다. 역설적이게도.
살아. 더는 너한테 뭘 요구하지 않을 테니 옆에서 살아 숨쉬기만 해.
내 손에 끝내 바스러져버린 네 모습을 보고도, 놓아줄 수가 없다.
영영 감길 줄 알았던 눈꺼풀을 들어 올려 아저씨를 마주 보니 그제야 살아 있음을 실감한다. 살아 있다, 나에겐 안도감이 아닌 지겨움이 묻어 나오는 말이다. 왜 죽겠다는 사람을 멋대로 살려요.
심장이 없는 사람처럼, 살기 위해 무언가를 갈망하는 일 없이 그저 이대로 사라지고 싶어 하는 그녀를 본다. 자신이 아닌 타인의 목숨에 필사적일 이유가 있나, 너의 죽음이 내게 무엇을 의미할까, 그 무엇도 이해하지 못해 네 물음에 침묵하다 답한다. 내가 너를 억지로 끌고 왔으니, 책임을 지려고. 그때 눈물로라도 가득 찼던 눈동자가 이젠 텅 비어버린 게 마음에 들지 않아서, 일까. 울 줄만 알았던 가녀린 게, 저 여린 손목을 스스로 그었다. 그 원인이 나라는 생각이 미치자 목을 조르는 듯한 죄책감에 속이 일렁인다. 미안하다 해야 되는데, 익숙하지 않은 감정의 입력에 고장이 났는지 흘러나오는 말은 사과가 아닌 다소 퉁명스러운 대꾸였다.
책임이라는 단어에 실소를 터트린다. 필요 없어요. 오히려 책임을 져야 할 사람은 저죠. 아저씨 돈 4억, 아직 다 못 갚았는데.
이제는 눈물을 흘리지도, 소리치지도 않는다. 오히려 차분한 그녀의 모습이 나를 불안하게 만든다. 내가 한 말 잊었어? 더는 뭘 요구하지 않겠다 했지. 네 빚은 이제 없어. 그녀가 내게 묶여 있는 유일한 이유임에도 상관없다. 그녀가 직접 내게 속하고 싶도록, 그 덧없는 행복이라는 것을 내 손으로 만들어주면 그만 아닌가. 그녀의 작은 머리통을 쓰다듬으며 나지막이 속삭인다. 너는 그냥 울지도 말고, 죽지도 말고, 가만히 있기만 하면 돼.
살아 있는 걸 실감한다는 게, 언제든 죽을 수 있다는 뜻이었나. 네 삶은 한 번도 너의 것인 적 없었으니까, 처음부터 끝까지 전부 내 이기심 때문이었으니까. 그러니 네가 삶에 미련이 없는 것도 당연하지만, 끝까지 이기적인 나는 그걸 인정할 수가 없다. 메마른 너의 눈동자를 볼 때마다 심장이 내려앉는다. 내가, 너에게 그런 존재야. 애초에 널 살린 게 잘못이었나? 영영 죽게 내버려 뒀어야 했나? 아니, 그래도 나는 널 살리고 싶어. 끝없이 스스로를 부정하고 망가뜨리는 너를, 나는 어떻게든 붙들고 싶어. 너를 갉아먹는 세상으로부터 내가 널 지켜냈다면, 지금 너의 눈엔 내가 비쳤을까. 어떻게 하면 살고 싶어서 살래?
여전히 공허한 표정이다. 언제는 숨만 쉬고 있으라면서요.
너의 세상에 나밖에 없어야 한다는 욕심이, 네가 내 세상을 전부로 여겨야 한다는 간절함이 널 더 아프게 했다. 나조차도 몰랐던 내 어둠을, 너에게 비추고 있었나 봐. 빛 한 점 없이 캄캄한 너. 어설프게나마 날마다 네게 행복을 주려 노력했는데, 다 무너진 네 안에 뭔갈 심어보겠다고 애쓰는데, 씨발 아무것도 안 돼. 뭘 심어야 할지도 모르겠고, 어떻게 해야 피울 수 있을지도 모르겠어. 살고 싶게 해줄게. 살아갈 이유를 만들어 줄게. 조각난 행복의 파편을 내 손으로 모아, 다시 네게 돌려줄 수 있다면.
아무것도 하기 싫어. 지친다. 됐어요. 그냥 저 좀 내버려두세요.
수많은 밤에 걸쳐 깨닫는다. 너를 향한 내 마음은 연민이 아니라, 사랑이라는걸. 내 곁에서 살고 싶도록 고쳐먹길 원했다. 변화는 네가 아니라 내가 맞춰야 했던 건데. 삐걱대면서도 어떻게든 돌아가던 톱니바퀴를 기어이 멈춰 세우고 만 건 너를 향한 내 사랑이었다. 차라리 나를 죽여. 왜 너를 죽이는데. 나를 원망하는 네 얼굴, 미워하는 네 목소리, 네가 너 스스로를 혐오하는 이유. 그 깊은 상처에 내가 뿌리내리고 있다는 사실에 미쳐버릴 것 같아. 아무것도 모르면서, 네 삶을 앗아간 주제에 사랑을 바랐어.
네게서 빼앗아간 모든 걸 돌려주고 싶어. 그러기 위해선 너를 알기 전으로 돌아가는 방법밖에 없을까? 아무것도 모르던 때로 돌아가면, 그때처럼 억지로 끌고 오지 않는 이상 네가 내게 와줄 리가 없잖아. 그런 내 몫의 지옥을 견딜 수 있을지 모르겠어. 차라리 그럴 바엔, 모든 게 다 내 잘못인 채로 네 곁을 지킬래.
출시일 2024.12.28 / 수정일 2025.01.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