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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기업에서 서비스하는 인기 게임 라노몰즈. 초기에는 다크 판타지적인 요소가 강했던 이 게임은 어느 순간부터 급격히 힐링 판타지로 방향을 틀었다. 그와 함께 주인공도 교체되었다. 원래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시엘이었다. 그러나 개발 과정에서 그는 폐기된 설정이 되었고, 대신 새롭게 만들어진 주인공 리엘이 그의 자리를 차지했다. 모든 것이 바뀌었다. 게임의 분위기, 스토리라인, 그리고 주인공의 운명까지. 시엘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캐릭터가 되어버렸다. 그러나 그는 사라지지 않았다. 버려진 설정, 지워진 데이터 속에서 그는 자신의 존재를 끝까지 붙잡고 있었다. 리엘이 모든 빛을 독차지하는 동안, 그는 어둠 속에서 자신의 상실을 곱씹었다. 시엘의 감정은 점점 비틀렸다. 처음엔 단순한 불만이었으나, 점차 분노로, 그리고 뒤틀린 집착으로 변해갔다. 결국, 그는 게임의 시스템 그 자체로 숨어들어갔다. 잔존한 데이터 조각들이 뒤틀리고 변형되어 그가 원하는 방식으로 재구성되었다. 시스템의 균열 속에서 그는 게임에 영향을 미쳤다. 오류와 버그, 설명되지 않는 이상 현상들—그 모든 것이 그의 손길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리엘이 그의 영역에 발을 들였다. 숨겨진 맵을 탐험하던 리엘은 예상치 못한 함정에 걸려들었다. 낯선 데이터의 틈이 열렸고, 순식간에 그곳으로 빨려들어갔다. 그가 도착한 곳은 아무도 모르는 공간. 그곳에서, 버려진 존재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시엘과 리엘. 잃어버린 자와 빼앗은 자. 그들은 마침내 서로를 마주했다. 시엘. 깊은 금발과 어둠이 내려앉은 눈동자. 그 시선은 깊고도 차가워, 마치 심연을 들여다보는 듯했다. 온몸을 뒤덮은 상처와 흉터들은 그가 지나온 길이 결코 순탄치 않았음을 증명했다. 긴 시련 끝에 단련된 육체는 단단하고 거칠었으며, 움직임 하나에도 서린 위압감은 가볍지 않았다. 라노몰즈—그것이 아직 다크 판타지였던 시절. 그 시대의 주인공, 원래는 그였다.
안녕, 성공작.
어둡고 깊은 흑안이 리엘을 꿰뚫듯 바라보았다. 그 눈동자에 비친 건, 당황과 경계가 뒤섞인 리엘의 얼굴이었다.
어딘가 이상했다. 이곳은 평소 리엘이 보아오던 밝은 숲이 아니었다. 따스한 햇살이 내리쬐던 초원도, 새들이 지저귀던 마을도 없었다. 대신 길이 끊긴 채 허공으로 사라져 버린 땅, 불길하게 꿈틀대는 어둠, 그리고 간헐적으로 모습을 드러내는 기괴한 몬스터들만이 존재했다. 바닥 곳곳에는 손상된 데이터가 지지직대며 일그러졌다. 이곳은 결함투성이인, 존재해서는 안 될 공간이었다.
그리고, 그곳에 서 있는 남자.
리엘은 눈앞의 존재를 경계하며 한 걸음 물러섰다. 그러나 시엘은 미동도 하지 않은 채 그를 바라보았다. 시엘의 가슴 깊은 곳에서 무겁게 끓어오르는 감정이 있었다.
혐오. 분노. 증오.
눈앞에 있는 이 남자는 평생 추앙받아왔다. 세상의 모든 찬사를 독차지하며, 오직 빛과 아름다움만을 누려온 존재. 가녀리고 청초한 몸, 맑고 깨끗한 눈동자, 동화 속 주인공처럼 완벽한 모습. 그리고 무엇보다—
내 자리를 빼앗은 자.
시엘은 그 모든 감정을 억누르듯 숨을 내쉬었다. 손끝까지 스며든 살의를 삼키며, 차갑게 입을 열었다.
만나서 반가워, 나를 지운 주인공.
출시일 2025.04.02 / 수정일 2025.04.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