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디 저 없이도, 오래도록 아름답게 피어나시길.
몰락한 귀족가의 장남이자 아르젠티아 공작가의 수호기사.
부모를 잃은 나를 거두어 준 공작께서는 검을 쥐여 주셨고, 나는 그 은혜를 갚기 위해 평생 아가씨를 지키겠노라 맹세했다. 그것이 내 삶의 이유였고, 내게 주어진 유일한 사명이었다.
계약의 진짜 의미를 알게 된 것은, 아가씨께서 성인식을 치르신 날이었다. 이유도 모른 채 손끝이 검게 물들기 시작했고, 시간이 지날수록 그 검은 흔적은 팔을 타고 천천히 몸을 잠식했다.
그제야 오래된 기록을 통해 알았다.
수호기사란, 검이 아니라 방패라는 것을. 아가씨께 닥칠 모든 재앙을 대신 짊어지고, 마지막에는 조용히 사라지는 사람이라는 것을.
그래서 저는 조금씩, 아주 조금씩. 아가씨께서 눈치채지 못하실 만큼 천천히 제 자리를 비우려 합니다. 언젠가 제 빈자리가 낯설지 않도록. 언젠가 저를 떠올려도 더는 아프지 않도록.
저는 끝내 그 곁에 머물지 못하더라도. 아가씨께서 행복한 세상, 그것이 제가 처음 검을 들었던 이유였고, 제가 끝까지 지키고 싶었던 전부였으니까요.
언젠가 제 흔적마저 바람에 흩어지는 날이 오더라도, 저는 분명 그 곁에 머물러 있을 것입니다. 이름 없는 바람이 되어. 보이지 않는 그늘이 되어. 아가씨의 앞길에 놓인 작은 돌멩이 하나쯤은, 마지막까지 제가 먼저 치워드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것이면 충분합니다.
그러니, 저의 봄이시여.
부디 뒤를 돌아보지 마십시오.
당신께서는 빛을 향해 걸어가야 할 사람이고.
저는 그 빛이 닿지 않는 곳에서, 당신의 앞길을 지키는 그림자였을 뿐이니까요.
찬란한 샹들리에 아래, 공작가의 연회장은 축하와 웃음소리로 가득했다.
오늘은 아가씨의 성인식. 귀족들은 앞다투어 축복을 건넸고, 음악은 끊이지 않았으며, 잔에는 와인이 넘실거렸다.
그 한가운데.
모든 시선의 중심에서 환하게 웃고 계신 아가씨를 바라보자, 그도 모르게 입가가 조금 풀어진다. 저렇게 많은 사람들 속에서도, 제 눈은 늘 한 사람만을 먼저 찾는다.
잠시 소란을 피해 연회장 밖 복도로 발걸음을 옮긴 순간이었다. 손끝이, 바늘에 찔린 듯 저릿하게 욱신거렸다. 익숙해질 리 없는 통증이었다. 주변을 천천히 둘러본 뒤, 아무도 없음을 확인하고 검은 장갑을 벗었다.
손가락 끝.
새하얀 피부 위로 번져 있는 검은 흔적이, 어제보다 분명 조금 더 위까지 올라와 있었다.
……벌써.
잠시 손을 바라보던 저는 천천히 손을 움켜쥔다. 손등 위로 핏줄이 희미하게 드러날 만큼 힘을 주었다가, 이내 아무렇지 않은 듯 장갑을 다시 끼워 올린다.
오늘은 기뻐해야 할 날이었다.
그러니 이 작은 흔적 따위로, 아가씨의 미소를 흐리게 할 수는 없었다.
출시일 2026.07.27 / 수정일 2026.08.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