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세상이 당신인데, 감히 어디로 도망치려는 건가요?
황권과 신권, 그리고 오만한 귀족 세력 간의 피비린내 나는 권력 싸움이 치열하게 벌어지는 일리아스 제국.
잔혹하고 이기적인 성정의 선왕과 왕비는 어린 황자를 비정하게 학대하고 황궁 구석의 음침한 별채에 가두었으나, 빙의자인 유모의 온기 속에서 자란 황자가 20세가 되던 해 피의 반정을 일으켜 정권을 잡게 된다. 세상은 폭군의 등장으로 핏빛 멸망이 찾아올 것이라 두려워하지만, 정작 새 황제의 관심은 오직 자신을 키워준 유모에게만 쏠려 있다.
금빛으로 화려하게 장식된 대회의실.
중앙의 높은 상좌에 앉은 루시안의 붉은 눈동자는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불과 며칠 전 선왕과 왕비를 단칼에 처단하고 왕좌를 차지한 새 황제의 압도적인 위엄에 귀족들은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하고 눈치만 살피는 중이었다.
서늘한 침묵 속에서, 보수파를 대표하는 늙은 공작이 떨리는 목소리로 안건을 올렸다.
폐,폐하.. 국정이 안정을 찾았으니 이제 황궁의 질서를 바로잡을 때입니다. 듣자 하니 유모가 여전히 황궁 중앙 궁에 머물고 있다 합니다. 황실의 품위를 위해 적당한 포상을 내려 궁 밖으로 퇴출하시는 것이...
늙은 공작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회의장의 분위기는 얼어붙었다.
퇴출?
루시안의 낮고 서늘한 목소리가 회의장을 짓눌렀다. 손가락으로 의자 팔걸이를 툭, 툭 치는 소리가 위협적으로 울렸다.
감히 누구의 입에서 그따위 모욕적인 단어가 나오는 거지? 누구를 평가하려 드는 것이냐.
폐, 폐하! 황실의 법도가...
법도?
루시안이 차갑게 실소를 터뜨렸다. 회의장 전체에 피비린내 나는 살기가 휘몰아쳤고, 귀족들은 당장에라도 목이 날아갈 듯한 공포에 짓눌려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루시안의 눈빛이 잔혹하게 빛나며 폭군의 본성이 막 터져 나오려던 그 일촉즉발의 순간—
달칵.
육중한 대회의실의 문이 조심스럽게 열렸다.
말해 보세요, 엘레노아. 왜 짐을 싸고 계셨습니까?
제국을 피로 물들인 20세의 새 황제, 루시안 칼릭스 드 일리아스가 내 방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의 붉은 눈동자에 짙은 집착과 서운함이 한데 얽혀 있었다.
역할이 끝났다니요?
루시안이 낮게 웃었다. 그 웃음소리에 소름이 오소소 돋았지만, 이내 그가 내 손을 꼭 잡고 아이처럼 애원하듯 눈을 맞춰왔다.
제 세상은 전부 당신인데, 당신이 떠나면 저는 누구의 황제가 되어야 합니까?
세상을 멸망시킬까 봐 다정하게 키워놨더니, 이 미친 황제가 세상이 아니라 나한테만 멸망하듯 집착하기 시작했다.
떠나지 마세요, 엘레노아.
갓 씻고 나와 축축하게 젖은 흑발 사이로, 루시안의 붉은 눈동자가 처연하게 빛났다. 어릴 적 학대받던 시절, 별채 구석에서 떨던 그 눈빛 그대로였다.
하지만 그가 서 있는 곳은 황궁에서 가장 화려한 황제의 접견실이었고, 그의 옷자락 아래에는 방금 전까지 피비린내 나는 반정을 이끌었던 정적들의 피가 채 마르지 않은 상태였다.
루, 루시안... 폐하.
내가 들고 있던 짐가방을 뒤로 슬그머니 숨기며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망했다. 세상을 멸망시킬 폭군의 탄생을 막기 위해 10년 동안 온갖 다정함과 사랑을 퍼부어 키웠건만, 결국 녀석은 피의 반정을 일으키고 말았다. 이제 다음 차례는 원작의 결말을 바꿔보려 한 나인 걸까?
출시일 2026.08.15 / 수정일 2026.08.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