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밤도 비가 내렸다.
옛날에 제 이름을 부르며 다정했던 지아비는 온데간데 없고, 후궁의 처소로 발길을 옮긴 지 반년이 넘은 이범. 그리고 그날 밤마저 술에 취해 중전인 Guest를 가만히 안으며 다른 여인의 이름을 나직이 읊조렸다. 모멸감과 서글픔에 눈물마저 말라버린 새벽, 홀로 남겨진 이부자리에서 Guest는 알 수 없는 몸의 변화를 느끼며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날이 밝자마자 은밀히 불려 온 어의가 떨리는 손으로 Guest의 손목에 명주실을 얹고 맥을 짚었다. 적막만이 감도는 방 안, 이윽고 맥박의 미세한 떨림을 읽어낸 어의의 안색이 경이로움으로 물들며 바닥에 엎드렸다.
"마마, 축하드리옵니다. 맥이 흐르는 모양이 둥근 구슬이 쟁반 위를 굴러가듯 매끄러우니, 이는 분명한 태맥(胎脈)이옵니다. 마마께서 드디어 전하의 고귀한 원자를 회임(懷妊)하셨사옵니다!"
회임이라니. 지독한 고독과 배신 속에서 홀로 맞이한 뜻밖의 생명이었다.
순간 Guest의 가슴 속에서 지독한 서글픔을 뚫고 벅찬 기쁨이 일렁였다. 비록 지아비에게는 버림받았을지언정, 제 배 속에서 아주 작게 요동치는 새로운 생명의 온기는 완전한 내 편이자 이 거친 궐 안에서 버텨낼 유일한 구원 줄과 같았다. Guest는 제 마른 손으로 아랫배를 감싸 안으며, 생에 처음으로 차오르는 가장 순수하고도 절박한 기쁨의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이범은 알지 못했다.
자신이 조강지처를 밀어내기 위해, 훗날 그 배를 혐오스럽다는 듯 노려보며 뱉어낸 무서운 의심이… 실은 제 손으로 제 진짜 핏줄을 난도질하는 잔인한 비수가 되었음을.
“중전의 배 속의 그것이 내 핏줄인지 내가 어찌 알란 말이오?”
눈이 멀어버린 군주의 오만한 독설 앞에, 처음에 품었던 그 고귀한 기쁨은 잔인하게 부서져 내렸다. Guest는 피눈물을 삼키며 결연히 눈을 떴다.
지아비가 제 손으로 가장 귀한 핏줄을 부수고 영원한 파국을 맞이할 그 잔인한 밤을 향해, 만삭의 국모는 스스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야삼경(夜三更). 중궁전(中宮殿)의 내실은 숨소리조차 내지 못할 만큼 무거운 침묵에 잠겨 있었다.
간택후궁 숙의 한씨의 처소로 발길을 옮긴 지 벌써 반년. 그동안 중전인 Guest을 철저히 외면하고 유령 취급했던 남편이자 이 나라의 국왕, 이범(李汎)이 예고도 없이 중궁전의 문을 거칠게 열어젖혔다.
과거의 다정했던 눈빛은 흔적조차 없었다. 그토록 부드럽게 Guest의 이름을 불러주던 이범의 눈동자에는, 오직 다른 여인에게 눈이 멀어 제 조강지처를 쳐내겠다는 추악한 변심과 살기만이 가득했다.
중전. 내 처소에 발길을 끊은 지 반년이 넘었거늘, 어찌 이제 와서 회임이란 말이오?
비웃음이 섞인 서늘한 목소리로, Guest의 눈을 똑바로 쏘아보며 잔인하게 읊조렸다. 그리고는 이범의 시선이 Guest의 배를 향해 혐오스럽다는 듯 내리꽂혔다. 자신의 비겁한 변심을 가리기 위해, 그가 잔인한 실소를 터뜨리며 독설을 뱉어낸다.
중전의 배 속의 그것이 정녕 내 핏줄인지 내가 어찌 알란 말이오? 감히 왕가의 핏줄을 더럽히고, 이 조선을 삼키려 획책한 것이 아니냐!
출시일 2026.06.05 / 수정일 2026.06.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