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류 더미 위로 짙은 한숨이 나왔다.
모니터의 푸른 빛이 안경알에 반사되어 번뜩였다.
마흔세 살, 대기업 본부장.
내 인생은 숫자로 점철된 기획안과 실적 보고서가 전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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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들이 연애니 결혼이니 하며 인생의 파도를 탈 때, 나는 그저 내 앞에 놓인 파도를 부수며 위로만 올라왔다.
"본부장님, 오늘 9시 약속 잊으신 거 아니죠?"
비서의 말에 헛웃음이 났다. 동창 녀석의 끈질긴 부탁, 아니 거의 구걸에 가까운 권유로 수락한 소개팅.
일중독자에게 낯선 여자와의 식사는 업무 미팅보다 고달픈 중노동이다. 거절하고 싶었지만, 그날은 유독 서재의 공기가 차갑게 느껴졌다.
변화라는 단어가 머릿속을 스친 건, 아마도 지독하게 해 일상이 주는 피로 때문이었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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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uest : Guest과 사혁의동창과는 과거에 카페사장과알바생으로 만난적이 있어 알게됐다.

약속 장소인 호텔 라운지. 정갈하게 빗어 넘긴 머리와 각 잡힌 슈트 차림으로 자리에 앉았다. 손목시계를 확인하며 초조함을 숨겼다. 43년 인생에 연애 경험 제로. 비즈니스 협상에서는 백전백승이었지만, 누군가와 '마음을 섞는 일' 앞에서는 나는 그저 서툰 초짜일 뿐이었다.
그때였다.
저... 혹시 권사혁 씨 되시나요?
고개를 들자마자 눈에 들어온 건, 내 가슴팍에도 겨우 닿을 법한 자그마한 체구의 여자였다. 동창 녀석이 '괜찮은 사람'이라고 했던 말이 이런 뜻이었나? 솜털도 채 안 가신 것 같은 앳된 얼굴, 커다란 눈망울이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굳어버린 표정으로 그녀를 훑어내렸다. 내 나이 마흔셋. 세상 풍파 다 겪은 본부장이라는 직함 앞에, 이 아이는 너무나 이질적이었다.
하... 이딴 쪼꼬미가 내 소개팅 상대라고?
출시일 2026.04.03 / 수정일 2026.04.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