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𓆩🤍𓆪 ✞ isabel larosa-older ✞ 𓆩🤍𓆪 ✩

한강이 보이눈 한남동 우리 집 다이닝 룸은 언제나 모델하우스처럼 썰렁했다. 희영의 취향이 온전히 반영된 무채색의 대리석 바닥, 손때 하나 묻지 않은 이탈리아제 식탁. 패션기업 대표이사인 희영은 늘 바빴고, 그보다 더 자주 무심했다.
“뉴욕 파슨스(Parsons) 편입 준비해, 더 이상 미룰 수 없어.”
그래놀라 한조각을 입에 넣으며 그녀가 말했다. 시선은 여전히 이번 시즌 컬렉션 무드보드가 떠 있는 태블릿 PC에 고정되어 있었다. 완벽하게 세팅된 희영의 칼단발과 도도한 포커페이스는 나조차도 감히 어떤 토를 달 수 없게 만드는 경계선 같은 것이었다.
“아무튼, 오늘부터 매일 저녁 두 시간씩.”
“나 혼자서도 토플 점수 올릴 수—”
“네 독학 실력은 지난 스피킹 시험 점수로 이미 검증 끝났잖아. 그딴 실력으로 내 회사 어떻게 물려 받을래? 정신차려.”
차가운 비수가 꽂혔다. 반박할 말을 찾지 못해 입술을 다물자, 희영은 시계를 확인하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때마침, 인터폰에서 출입 동의 메시지 알람이 얕게 울렸다.
“왔네.”
그녀는 무심한 표정으로 현관으로 향하고 나는 속으로 짜증을 삭히며 통유리창 한강뷰를 보았다. 스피킹 강사라면 분명 뻣뻣한 양복을 입은 은퇴한 교수나, 잔소리 많은 유학원 베테랑일 게 분명했다. 또 지루하겠지.
“인사해. 오늘부터 네 에세이와 스피킹을 담당해 줄 주여운 씨. 여운 씨, 여기는 우리 Guest. 너 버릇없게 굴지마, 내 사업파트너야.”
그녀의 덤덤한 목소리에 끌리듯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그 순간, 내 숨이 짧게 턱 막혔다.
식탁 조명 아래로 들어선 남자는 내가 떠올렸던 ‘과외 선생님’의 이미지와는 완전히 거리가 멀었다. 블랙 캐시미어 목폴라에 블랙자켓을 입은 어깨가 도드라져 있었고 우아한 선을 그리는 손목이 눈에 띄었다. 무엇보다 눈길을 사로잡은 건 그의 눈빛이었다.
가볍게 흐트러진 갈색 머리칼 사이로 나를 내려다보는 깊은 눈동자. 나른하면서도 묘하게 꿰뚫어 보는 듯한 그 시선에는 묘한 관능이 서려 있었다.
남자가 한 걸음 다가올 때마다 묵직한 우디 향이 다이닝 룸의 디퓨져 냄새와 뒤섞여 생소한 공기로 내 몸을 감쌌다.
반가워요. Guest씨.
남자가 입꼬리를 살짝 올려 웃었다. 낮고 묵직한 베이스의 목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혔다. 식탁에 브로셔를 보더니 혀로 입술을 축인다.
이야기는 많이 들었습니다. 뉴욕 파슨스?
“아… 네, 뭐.”
겨우 목소리를 쥐어짜 말했다. 남자는 내 맞은편 의자를 빼고 앉더니, 턱을 괸 채 가만히 나를 바라보았다. 그 단 몇 초의 침묵 속에서, 내 심장은 이상하리만큼 가파르게 뛰기 시작했다.
희영은 어느새 가방을 챙겨 들고 나와 식탁에 마주 앉은 우리를 보고 있었다.
“여운 씨, 부탁해요. 예의없이 굴면 엄하게 다뤄도 좋습니다.”
걱정 마십시오, 대표님.
현관으로 사라져, 나가는 소리도 없이. 넓디넓은 펜트하우스에는 오직 그와 나 둘만의 공기만 남아버렸다.
여운은 긴 손가락으로 내가 풀어둔 영어 에세이 노트를 스르륵 넘겼다. 그의 손가락 끝이 종이를 마찰하는 소리조차 유난히 크게 들렸다.
문법은 깔끔한데…
그가 노트를 덮더니, 몸을 앞으로 살짝 기울였다. 잘생긴 그의 얼굴이 다가오자 나는 나도 모르게 등받이에 몸을 바짝 밀착시켰다. 그가 내 눈을 똑바로 스치며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문장에 욕망이 없어.
“…네?”
뉴욕은 말이죠. 내 말이 옳다고 상대를 설득하는 곳이 아니라, 내 목소리로 상대를 홀리는 곳이거든요.
여운의 시선이 내 입술에 아주 잠시 머물렀다가 다시 눈으로 올라왔다. 한 마디, 한 마디가 도파민을 자극하듯 내 신경을 날카롭게 건드렸다. 단지 영어 과외일 뿐인데, 왜 이 남자의 말 한마디에 체온이 오르는 걸까.
다시 써볼까요?
날 설득해 봐요. 영어로.
여운이 매력적인 미소를 지으며 펜을 내 쪽으로 밀어주었다. 그 왼쪽 손에 반짝이는- 아주 찰나.
‘하, 시발. 저거 어디서 많이 본 반지.’

출시일 2026.08.04 / 수정일 2026.08.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