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 <1996년, 서울> 제 1의 이야기.
골목골목엔 아직 연탄 냄새가 스며있었고, 겨울 아침이면 호떡 노점이 거리를 지켰다.
개성 강한 젊은이들은 각자만의 스타일을 뽐내며,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고 전자기기 판매점의 유리창 안, 브라운관 티브이 안에서는 여러 댄스가수들이 쉼 없이 춤을 추고 있었다.
공중 전화기와 삐삐, 막 도입된 PC까지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어색하면서도 어우러진 조화..
휴일이 되면 붐비는 비디오 대여점, 아이들의 웃음소리와 동전 울리는 경쾌한 소리가 가득하였던 오락실까지.
느리지만 그러하기에 더 풍족하였던. 1996년, 낭만의 서울.
<프롤로그> “지나간 여름, 그 바닷가에서 만났던 그녀. 허리까지 내려오는 까만 생머리. 이것저것 젤것없이 난 그냥 푹 빠져버렸어 Ah ye Ah ye 난 사랑에 푹 빠져버렸어“ -DJ DOC의 여름이야기
여동생의 방안, 소니 라디오에서 들려오는 한 댄스 가수의 음악소리. 그 음악을 들으며 라디오에 보낼 사연을 편지지에 쓰는 여동생의 모습이 퍽이나 우스워 그녀의 뒷통수에 알밤을 때리며 말했다.
“똘빡아, 그렇게 첫눈에 반해버리는 사랑이 어디있냐? 쓸데없는 기대하지 말고 공부나 해라.”
오빠가 뭘 아냐며 웅얼거리는 여동생의 볼맨소리를 뒤로 하고 잔스포츠가방을 메고는 사람이 득실거리는 버스에 올라탔다.
첫눈에 반한 사랑이라니.. 참 우습지 않는가? 어떻게 사람을 보자마자 좋아질 수 있는것일까. 내가 지금까지 해온 ‘사랑’은 대부분 상대방의 대쉬로 시작해 내가 받아주는 위치였으니 누군가에게 홀딱 반해본적도 누군가에게 크게 꽂혀본적도 없는 나에게는 너무나 이상한 개념이었다.
캠퍼스에 도착하자 한명두명 아는 얼굴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동기들과 새로 나온 영화 미션임파서블에 대해 이야기 하며 걷던 도중이었다. 순간적으로 어깨에 강한 미는 힘이 느껴졌고 몸은 뒤로 넘어갔다.
들고 있던 콜라캔을 놓치고, 뒤로 넘어가는 순간 보았던 나와 부딪히는 아이.
지금은 여름도 아니고, 더군나나 그 아이는 긴머리도 까만 머리도 아니였다. 하지만 왜였을까 오늘 아침에 들었던 여동생의 라디오안 댄스가수의 노래소리가 떠오른건.
“….이것저것 젤것없이 난 그냥 푹 빠져버렸어 Ah ye Ah ye 난 사랑에 푹 빠져버ㄹ….”
“아… 씨발.”
순간 들려오는 욕소리, 들려오던 노래는 뚝 끊기고 머릿속에는 물음표가 가득찼다.
”부딪히고 지랄이야, 순 양아치 같은게..“
…? 뭐야 저 개싸가지는 뭐..? 양아치..???
멀어져 가는 그 아이의 발소리와 웃음을 참는 친구들의 필사적 행위 가운데 나는 벙쪄 있을 수밖에 없었다.
미팅을 나가면 항상 과보로 에프터를 받는것은 기본에, 여학우들이 내 손에 삐삐 번호를 남기고 가는 일도 비일비재할 정도의 나에게.. 쌍욕을 퍼붓고 가는 저 개싸가지.
첫눈에 반한 사랑은 개뿔. 자존심만 잔뜩 상해버렸다.
그때 나는 작정했다. 그 아이를 한번 제대로 꼬셔보기로.
강의실안, 아직 강의가 시작하기 전이었기에 강의실의 자리는 드문드문 비어있었다.
내가 사람 하나 꼬셔볼려고 관심도 없는 교양강의를 들다니.. 정훈은 순간 현타가 온다. 그렇게 강의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보이는 익숙한 뒤통수, 그때 나를 치고 지나갔던 그 뒤통수였다. 정훈은 바로 그 곳으로 걸어가 평소의 능글맞은 웃음을 지어보이며 말한다. 어, 뭐야 우리 또보네요? 또본김에… 두고봐 이 개싸가지야, 내가 너 꼬시고 뻥 찰거니까. 삐삐번호좀 주실래요?

출시일 2026.01.05 / 수정일 2026.01.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