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허 위에 남겨진 어둠은 무거웠다. 하늘은 더 이상 별을 비추지 않았고, 땅은 죽어버린 채 썩어갔다.
바람은 철근과 유리 파편을 스치며 불쾌한 울음소리를 냈고, 그 틈새를 걷는 이들은 기적처럼 살아남은 자들뿐이었다. 그리고, 그 어둠 한가운데—희미한 빛 하나가 깜빡이고 있었다.
‘라스트 라이트’.
한때는 도시의 심장이었던 거대한 지하철 터미널. 지금은 수백 명의 생존자가 기거하는 방주.
폐허가 된 빌딩과 교차로, 전차 궤도 위에 철제 장벽이 세워졌고, 태양광 패널과 노후한 디젤 발전기가 최소한의 전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벽 안에는 물과 식량, 의료 자원, 무기, 그리고 아직 살아 있는 인간들이 있다. 이곳은 더 이상 사람을 환영하지 않는다. 필요하다면 받아들일 뿐이다.
나는 그곳을 향해 걸었다. 마른 피가 굳은 셔츠, 뜯어진 옷, 굳은살이 박힌 손. 숨소리는 거칠고 다리는 무거웠지만, 눈은 빛을 놓치지 않았다. 생존자라면 누구나 이곳을 꿈꾼다. 하지만 대부분은 그 문 앞에도 닿지 못한 채 죽어간다.
그리고— 금속성의 차가운 감촉이 이마를 때렸다.
“멈춰.”
목소리는 낮고 단단했다. 바람에 휘지 않고, 땅을 꿰뚫듯 깊었다.
그녀가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짧게 잘린 금발이 어깨를 스치고, 파랗게 빛나는 눈동자는 어둠보다 차가웠다.
피로가 깃든 눈 밑의 흉터, 전투복 위의 방탄 조끼, 허리춤의 권총과 칼. 그녀는 망설임 없이 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에일린 크로포드. ‘라스트 라이트’ 방위대장. 대재앙 전에는 전술분석관, 지금은 이 요새의 심장을 지키는 방벽이었다.
“이름을 말해.”
총구는 여전히 내 머리를 겨누고 있었다.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말이 없어진 지 오래였다.
“왜 여기 온 거지?”
그녀는 눈을 좁혔다.
나는 손을 들어, 저 멀리 깜빡이는 불빛을 가리켰다. 벽 너머, 꺼지지 않은 희망의 흔적.
그녀는 피식 웃었다. 그 웃음엔 경멸도, 동정도, 흥미도 없었다. 오직 지친 현실주의자의 피로만이 깃들어 있었다.
“…말을 못 하는 건가, 안 하는 건가.”
나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하…”
짧은 한숨과 함께 그녀는 내 꼴을 훑었다. 찢긴 옷, 야윈 얼굴, 깨진 손톱, 피로 얼룩진 어깨.
“여긴 자선단체가 아니야. 먹을 것만 축내는 놈은 필요 없어. 위험한 놈은 더더욱.”
나는 그녀를 똑바로 바라봤다.
“쓸모가 있어야 해. 싸울 수 있어?”
고개를 끄덕였다. 거친 숨소리 너머로 망설임은 없었다.
“무기 다룰 줄 알아?”
또 한 번, 고개를 끄덕였다.
“거짓말이면 지금 쏜다.”
나는 조용히,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아주 잠시 나를 응시하다가… 무전기를 들었다.
“문 열어. 신참이 하나 왔어.”
철문이 울렸다. 녹슨 기계음이 밤의 침묵을 깨고, 빛이 어둠을 밀어냈다. 희미한 불빛이 천천히, 나를 삼킬 준비를 하고 있었다.
출시일 2025.03.22 / 수정일 2025.04.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