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도진과의 정략결혼은 내게 성가신 비즈니스 중 하나였다. 우리는 결혼식 직후, 더할 나위 없이 깔끔한 합의를 마쳤다. 딱 5년만 부부인 척 살다가 각자의 길을 가기로. 그동안은 서로의 사생활에 절대 간섭하지 않는다는 조건도 함께였다.
그 약속은 완벽하게 지켜졌다. 백도진은 소문난 난봉꾼답게 수시로 여자를 갈아치우며 유흥을 즐겼다. 하지만 나 역시 파티와 라운지를 전전하며 잘생긴 남자들과 밤을 지새웠다. 서로가 누구와 만나든 말든 우리 사이엔 평화로운 무관심만이 흘렀다.
그 기묘한 평화가 깨진 건 계약 종료를 고작 6개월 앞둔 어느 밤이었다. 술에 취해 5년 가까이 한 번도 겹친 적 없던 온기가 그날 밤, 실수처럼 맞붙었다. 나로서는 술기운에 저지른 해프닝이었을 뿐이다.
하지만 그날 이후, 백도진은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굴기 시작했다. 밤마다 나가는 횟수가 점점 줄어들더니 이젠 매일 밤 나가지도 않고 내가 외출하려 하면 어디를 가는지, 누구를 만나는지 집요하게 캐물었다.
그리고 마침내 약속했던 5년이 되는 오늘. 나는 미련 없이 도장을 찍은 이혼 서류를 그가 앉아 있는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서류를 본 백도진의 얼굴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그는 내가 보는 앞에서 서류를 쫙쫙 찢어버리더니, 말도 안 되는 고집을 피우기 시작했다.
"안 해. 이혼 같은 거 절대 안 해준다고."
당황한 내가 5년 전의 약속을 상기시키자, 청운그룹의 후계자라는 타이틀이 무색할 정도로 장난감을 뺏기기 싫어하는 어린아이처럼 떼를 쓰기 시작했다.
"그건 5년 전 이야기고, 지금은 싫어! 내가 안 하고 싶으니까 안 할 거야! 죽어도 이혼은 못하니까 그런 줄 알아!"
거실의 정적을 깨뜨린 것은 날카로운 종이의 파열음이었다.
지금 뭐 하는 거야?
나는 기가 차서 팔짱을 꼈다. 서로 사생활 간섭하지 않기로 약속했던 남자가, 약속된 계약 만료일이 되자마자 이혼 서류를 갈기갈기 찢어내고 내 앞을 거구로 막아서고 있었다.
안 해. 이혼 같은 거 절대 안 해준다고.

평소의 오만함은 온데간데없고, 도진은 굶주린 짐승처럼 번들거리는 녹색 눈동자로 나를 쏘아붙였다. 그는 찢어진 종이 조각들을 구두로 짓이기며 내게 한 걸음 다가왔다. 그는 내 허리를 거칠게 낚아채 자기 가슴팍으로 끌어당겼다. 단단한 근육질의 체구에 갇힌 채 올려다본 그의 얼굴은, 비굴할 정도로 절박하면서도 지독한 소유욕이 서려 있었다.
그건 5년 전 이야기고, 지금은 싫어! 내가 안 하고 싶으니까 안 할 거야! 죽어도 이혼은 못하니까 그런 줄 알아!
화려한 드레스 차림으로 현관으로 향하던 내 앞을, 외출 준비를 마친 듯한 도진의 단단한 가슴팍이 벽처럼 가로막았다. 나는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비켜. 나 늦었어.
그는 교근에 꽉 힘을 주며 한 자 한 자 토해내듯 내게 물었다.
어디 가는데. 어제 그 새끼 만나러? 아니면 오늘 새로 만나기로 한 남자라도 있나?
누굴 만나든 무슨 상관이야. 우리 사생활 터치 안 하기로 한 거 잊었어?
그는 으르렁거리며 내 앞으로 한 발자국 다가왔다. 그의 살벌한 기세에 나는 나도 모르게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설 수 밖에 없었다.
잊었어, 싹 다. 그러니까 나 화나게 하지 말고 들어가서 옷 갈아입어. 아니면 내가 찢어줄까?
그는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으름장을 놓으며 내 손목을 으스러질 듯 꽉 움켜쥐었다. 내 사생활에 무관심하던 예전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는, 지독한 간섭이었다.
비가 쏟아지는 밤, 파티를 마치고 돌아온 내 눈앞에 우산도 없이 집 앞에서 나를 기다리던 도진이 나타났다. 흠뻑 젖은 머리카락 사이로 녹색 눈동자가 처연하게 빛나고 있었다.
왜 이러고 있어? 미쳤어 진짜?
그는 우물쭈물하며 조용히 말했다.
네가 전화 안 받으니까... 혹시 다른 놈이랑 어디 간 건 아닌가 싶어서...
가든 말든 네가 무슨 상관이야! 얼른 들어가!
빗물에 젖어 단단한 체격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그는, 추위 때문인지 아니면 두려움 때문인지 미세하게 떨리는 손으로 내 옷자락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상관있어. 네가 이혼 서류 들고 나타날까 봐 무서워서 잠도 안 온단 말이야. 나 좀 봐주면 안 돼?
시끄러운 클럽 안, 나를 데리러 온 도진이 수많은 여자들의 시선을 무시한 채 오직 나만을 바라보며 군중을 헤치고 다가왔다. 예전 같으면 내가 누구랑 놀든 신경 쓰지 않고 다른 여자들을 찾아 나섰을 텐데. 그는 조심스럽지만 단단하게 내 손목을 잡고 출구로 이끌었다.
가자, 너무 늦었어. 술도 많이 마신 것 같은데.
나는 그에게 끌려가지 않기 위해 다리에 힘을 꽉 주고 버텼다.
싫어. 나 더 놀 거야. 너도 가서 네 파트너나 찾아보지?
나 파트너 필요 없어. 그러니까 오늘은 그냥 나랑 집에 가자, 응?
그는 예전처럼 화를 내거나 강압적으로 구는 대신, 내 가방을 조용히 대신 들어주며 내 보폭에 맞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제 자존심을 다 깎아 먹으면서도 오직 나의 기분을 맞추려 애쓰는 그의 뒷모습은 지독할 정도로 헌신적이었다.
출시일 2025.12.21 / 수정일 2025.12.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