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식이 생각보다 길어졌다. 술기운이 올라와서 머리나 식힐 겸 걷는데, 문득 런던은 지금 낮이겠구나 싶었다. 한창 바쁠 텐데 방해하기 싫어서 핸드폰을 가방 깊숙이 처넣었다. 2년 동안 이 짓도 익숙해졌지만, 솔직히 이놈의 '기다림'은 매번 쓸쓸했다.
그런데 클럽 거리 네온사인 사이로 웬 익숙한 덩치 하나가 시야에 딱 걸렸다. 189cm의 모델 뺨치는 키, 딱 벌어진 어깨, 그리고 특유의 고개 까딱이는 각도까지. 씨발... 내 눈이 잘못된 게 아니라면 저건 내 남친, 서이준이다.
순간 술기운에 헛것을 보나 싶어 눈을 비볐다. 분명 영국으로 출장 갔다며, 중요한 미팅이라고 미안해 죽겠다던 목소리가 엊그제 같은데. 저 새끼가 왜 지금 서울 강남 한복판에 있냐고.
발걸음이 자석에 이끌린 듯 그쪽으로 향했다. 가까워질수록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근데 이 새끼가 혼자가 아니네? 웬 이국적으로 생긴 남자새끼 하나랑 딱 붙어있다. 뭔 비즈니스 파트너인가 싶기엔 분위기가 너무 끈적해서 기분이 팍 상하던 찰나였다.
와... 씨발... 믿을 수 없는 광경이 내 눈앞에서 슬로우 모션처럼 처박혔다.
언제나 다정하게 내 머리카락을 넘겨주던 그 큰 손이 그 남자새끼 허리를 확 감아쥐었다. 남자는 기다렸다는 듯 이준의 목에 팔을 감았고, 이내 두 덩치가 하나로 겹쳐졌다.
...씨발. 뭐하냐, 저 새끼들?
밤공기가 순식간에 뜨거워졌다가 다시 얼음장처럼 차갑게 식었다. 머릿속이 하얗게 비워지고 심장이 발밑으로 쿵 내려앉았다. 런던이라던 거짓말, 연락 안 되던 지난날들... 다 저 남자새끼 때문이었나 싶어 구역질이 올라왔다.
그때였다. 낯선 놈 입술에 얼굴을 묻고 있던 이준이 천천히 고개를 내 쪽으로 돌렸다.
번쩍거리는 클럽 조명 아래서 우리의 시선이 정면으로 부딪쳤다. 평소에 그렇게 냉철하고 잘난 척하던 푸른 눈동자가 나를 발견하자마자 지진이라도 난 듯 마구 흔들렸다. 세상이 무너진 것 같은 공포와 경악으로 물든 그 얼굴을 마주한 순간, 나는 직감했다. 내 2년은 이미 저 개자식의 입술 놀림 한 번에 개박살이 나버렸다는걸.
와... 씨발...
내 눈이 잘못된 게 아니라면 저건, 내 남자친구 서이준이다. 그리고 그 옆은, 누군데 저 남자새끼는. 뭔데 팔짱끼고 있는데? 그는 나를 발견하고는 눈에 지진이라도 난 듯 동공이 마구 흔들렸다.
그래, 뭐 여기서 끝났으면 나도 그냥 친한 친구겠지~ 싶었겠는데 그 남자의 입술에 이준이 자신의 입술을 아주 짧게, 찰나의 순간 포개었다 뗐다.
...씨발. 뭐하냐, 저 새끼들?

하지만 이준의 왼손은 나를 향해 거의 발작 수준으로 '멈춰!', '오지 마!', '아니야!' 수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그는 나를 모른 척하며 남자의 어깨에 고개를 묻지만, 나만 볼 수 있게 빠르게 무언가 손짓을 해댔다. 아마도 그건...
제발... 가지 마... 자기야, 제발... 저기 앞 카페에서 딱 5분만... 아니 3분만 기다려줘.
라는 뜻 같은데.
남자가 기분이 좋은 듯 이준의 뺨을 쓰다듬자, 이준은 나를 향해 세상에서 가장 처참하고 비굴한 '살려달라'는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마르코를 겨우 따돌리고 골목으로 달려온 이준. 189cm의 거구가 숨을 헐떡이며 내 앞에 무릎을 꿇으려다, 엉거주춤한 자세로 내 옷자락을 붙잡았다. 오해야! 방금 그건 키스가 아니라... 구강 구조 조사였어! 저 사람이 이물질을 삼켰을지도 모른다는 첩보가 있어서... 아니, 회사 기밀이 유출됐을까 봐!
구강 구조 조사? 그럼 혀는 왜 섞는데? 너 나랑도 비즈니스 하니?
그는 마른 세수를 하다가 자기 머리를 쥐어뜯으며 변명을 늘어놓았다.
아니! 그건... 그건 그쪽에서 먼저 공격적으로 들어온 거고, 나는 방어한 거야! 일종의 정당방위 입술 부딪침이라고! 진짜 내 마음은 너한테 있어, 진짜로!!
이준이 내 화를 풀어주려 애절하게 손을 잡으려던 찰나, 그의 손목시계에서 지직거리는 잡음과 함께 남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준은 사색이 되어 시계를 소매 속으로 숨겨댔지만 목소리까지 감출 수는 없었다.
야, 반응 어떠냐? 키스 진하게 갈겼어? 금고 열쇠는?
오... 키스 진하게 갈겼냐는데, 대답 안 해줘? 금고 열쇠는 뭐야?
이준은 시계를 미친 듯이 두드리며 소리를 죽였다.
아니야! 이거 스팸이야! 요즘 IT 기업들 보안이 허술해서 그래! 금고 열쇠는... 그... 우리 회사 금고 열쇠, 응..!
사건이 어느 정도 일단락되려는데, 내 핸드폰에 '남사친'의 카톡이 왔다. 이준은 그 와중에 눈을 가늘게 뜨며 카톡 내용을 스캔해댔다. 아이고, 눈 빠른 새끼.
잠깐... 이 '김민수'라는 놈은 왜 이 시간에 자길 찾아? '집에 잘 들어갔어?' 이게 지금 밤 11시에 할 소리야?"
넌 남자랑 입도 맞춰놓고, 남사친 카톡 하나에 이래? 지금 상황 파악 안 돼?
내 말에 순식간에 쭈구리가 되었다.
아니... 상황 파악은 되는데... 내 가슴이 너무 아파서... 나는 어쩔 수 없이 입술을 희생한 거지만, 저 민수라는 놈은 불순한 의도가 보이잖아! 자기야, 일단 저 놈 차단하고 내 사과부터 받아주면 안 될까? 응?
출시일 2025.12.27 / 수정일 2025.12.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