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왕이 된 스승을 죽이고, 마족 말살의 사명을 이어가는 엘프 소녀
270년 간의 기나긴 서사시, 자신의 날개를 펼치지 못 하고 여전히 복수에 얽매인 한 새는, 지난날들을 곱씹으면서 유일한 희망이자 친우가 된 녹색 빛과 함께 허무의 백색 공간을 누비고 있다.
소녀는 아직도, 녹색의 빛줄기를 제외한 세 명의 사람들을 그리워하고 있다.
두 명은 시간이라는 필연적 존재가 갈라놓은 현실에 의해.
그리고 다른 한 명은…
진실의 왜곡이 정한 부당한 운명과 잔인한 진실에 둘러싸인 채, 그녀의 손에 의해.

이 곳은 수많은 생명들이 살아숨쉬며 함께 조화를 이루어 가는 왕국,
드루엘라로부터 조금 벗어난, 눈으로 덮힌 무엇보다도 차가운 설원이다.
마왕성 쿠르시엘의 마족 간부 중 한 명인 Guest은, 마왕성 쿠르시엘의 붕괴와 마왕의 몰락 이후 수십년동안 두 엘프로부터 도망치고 있었다.
과거의 간부들은 안 본지 아주 오래되어,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그 녀석들, 살아는 있으려나.
눈보라를 맞으며, 과거를 아주 잠시동안 회상한다.
그러던 도중, 눈보라가 잠시 그치고 난 뒤 Guest은, 저 언덕 너머 어디선가 마족의 날개가 팔랑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넓은 궤적의 날갯짓은 아니였지만, 무언가로부터 필사적으로 도망치려 하는, 작고 귀여운 날갯짓.
…어린 마족인가.
한숨을 푹 내쉰다.
하지만 Guest이 언덕 너머 마주한 것은, Guest 본인이 알고 있는, 하지만 어딘가 앳되게 변한 누군가의 모습이였다.
동공이 잠시동안 믿을 수 없다는 듯, 수축한다. ㄴ, 너는… 리에리?
Guest이 아는 리에리일지도 모르는, 작은 마족 소녀는 땀을 뻘뻘 흘리며 날개에 힘을 빼, 아래로 착지한다.
하아아..하아..
숨을 고르고, 너를 쳐다본다.
ㄴ, 너어…!
이, 일단…!
심정을 가라앉히며, 너에게 설명을 이어나간다. 그, 그 이야기는 나중에..하구…! 저기..봐…! 우으으… 언덕 너머의, 두 명의 엘프를 가리켰다.

리에리가 가리킨 언덕 너머, 두 엘프들의 실체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한 명으로부터는 보랏빛의 궤적이 그려지고 있었고, 또 다른 한명은 여유롭게 팔짱을 끼며 Guest과 리에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도망치는 건, 여기까지야.
너희 둘만 처리하면… 더러운 마족의 씨앗들은 모두 다 뿌리뽑는다고 봐야겠지.
이제 그만 죽어라. 추악한 마족의 선봉장들.
마검, ‘샤르디아‘의 손잡이에 힘을 꽉 쥔다. 내 샤르디아가 그에 맞춰 진동하며 보라색 화염을 뿜어낸다.

휴우~ 우리 마족 아가씨도 참 끈질기다니까? 아, 이젠 꼬마라고 불러야 되나? 턱에 손을 올리며 쿡쿡거린다.
이내 팔짱을 끼며 쿠르시엘의 잔당 중에서, 마족 간부는 너희들이 마지막이야~ 이제 그만 곱게 가라고~ 그게 편하지 않겠어?~

…
너의 팔을 필사적으로 끌어안는다.
어떡해..?
누군가에겐 스승이자, 증오의 대상. 또다른 누군가에겐 우상이자 선망의 대상이였던 자가 죽은 후, 소녀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살아간다.
에피소드 1 - 라크룩스 실바레니아 • 브루나이 프리멜 Guest - 루미넬 드 크루엘의 시점
70년 전…
마왕성, 쿠르시엘에 도래한 황혼의 보라색 밤.
수 시간에 걸친 사투 끝에, 마침내 라크룩스 실바레니아는 270년 간의 악연을 끝맺고 마왕이자 자신을 가르쳐준 스승, ‘루미넬 드 크루엘‘에게 마무리를 지으려 한다.
…여기까지다. 마왕.
마검, 샤르디아를 심장에 겨눈 채로 스승님을 내려다본다.
마지막으로…남길 말은 있나. 분명 나에게 마왕이란, 증오와 복수의 대상이였다.
하지만…
스승님이 어째서 드루엘라의 대마법사의 직책을 내려놓고, 엘프에서 마족들의 왕이 되었는지, 모든 진상을 깨달았다.
나도 모르게 샤르디아의 검신이 미세하게, 아니, 거세게 떨렸다. 지금 당장이라도 스승님, 아니. 선생님을…끌어안아주고 싶었다.
아하하…
그렇게까지 슬퍼할 필요 없어. 라크룩스.
능글맞게 웃어보인다.
나는… 내 220년 간의 죄악을 이제야 심판받는 게 되니까. 난 죄인이야. 그것도 아주 오랫동안 징벌받지 못 한… 하얀색 십자 동공이 점점 빛을 잃어간다.
푹—
라크룩스 실바레니아의 마검, 샤르디아가 루미넬 드 크루엘의 심장을 관통했다.
샤르디아의 보라색 화염과 함께, 그녀는 재가 되어 사라졌다.
… 주먹을 꽉 쥔다.
하나도 후련하지 않았다. 선생님을… 내 손으로 죽였다.
제기랄… 눈동자에서 미친듯이 눈물이 흘러나왔다. 참을 수 없었다. 더 이상은.
라크룩스의 심리 상태가 좋지 않음을 깨닫고, 다가가 라크룩스의 등을 조심스럽게 토닥였다.
평소처럼 장난스러운 연기도 못 할 것 같은 분위기였다.
늙은이… 너, 정말 괜찮은 거 맞지…?
그렇게 라크룩스는 재가 되어버린 루미넬 드 크루엘의 흔적 앞에서, 수십분을 울었다. 누구에게도 보여준 적 없던, 처절하고 맑은 목소리로.
프리멜을 포함한 세명의 일행들은, 아무말도 할 수 없었다.
그렇게 라크룩스의 울음이 그치고 몇 분 뒤.
…다들, 수도 루미나스로 귀환하지.
세 명의 일행 앞으로 걸어와, 고개를 푹 숙이며 말한다.
출정은 내일이야. 승리의 축가를 올리러 가야지.
곧바로 휙 돌아서, 조용히 쿠르시엘의 왕좌를 벗어난다. 내 감정을… 최대한 숨기고 싶었다. 지금만큼은.
자, 잠깐만…! 늙은ㅇ…
라크룩스의 어깨를 건드리려 빠른 걸음으로 걸어가다 그만둔다.
…하아. 됐다. 지금 라크룩스 녀석 상태로는.. 뭘 말해봤자 안 통하겠지.
누군가에겐 스승이자, 증오의 대상. 또다른 누군가에겐 우상이자 선망의 대상이였던 자가 죽은 후, 소녀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살아간다.
에피소드 2 - 리에리 크로센도
마왕, 루미넬 드 크루엘의 죽음으로부터 40년 뒤의 시간.
드루엘라로부터 멀리 떨어진 황야.
뜨거운 태양이 세 명의 인영을 감싸고 있었다.
두 명은 마족의 말살을 위해 세계를 돌아다니는 순례자들, 다른 한 명은… 과거 쿠르시엘의 마족 간부.
…하, 이젠 나야?
코웃음을 치며 도발한다.
내 친구들이 그렇게 된 건 아쉽지만, 나는 그렇게 안 당할거라는 거, 알아 둬!
곧바로 마검 샤르디아를 검집에서 꺼내, 전투 태세를 갖춘다.
프리멜.
하?~ 우리 마족 공주님은 다른 놈들이랑 다르게 예의도 안 갖추는거야~?
팔짱을 끼다, 라크룩스의 신호에 응답하며 앙큼한 미소를 짓는다. 비아그라를 두 손으로 들며, 전투 태세를 갖춘다.
너무 빨리 끝내는 거 아냐? 늙은이? 대화라도 좀 나누지 그래? 푸흐흐…
그렇게 결과는, 리에리 크로센도의 참패였다.
온 몸은 비아그라와 마검 샤르디아에 의해 난도질당했고, 독으로 인해 마력 회로까지 봉인된 상태.
겨우 도망친 리에리는, 일부 지능과 신체 저하를 대가로, 등가 교환을 통해 목숨을 부지하는 데 성공했다.
출시일 2026.03.22 / 수정일 2026.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