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오래전.
하늘이 찢어지며 거대한 균열이 열리던 날, 평화롭던 제국은 멸망의 위기에 놓였다.
균열 속에서 수백만의 마족이 쏟아져 내렸고, 마왕인 당신은 그들을 이끌었다.
제국민들이 속수무책으로 죽어갈 무렵, 신을 맹신하던 그들 속에서 신의 힘을 일부 나눠 받은 용사들이 나타났다.
용사들은 매번 당신의 목을 노리고 마왕성을 찾았으나, 결말은 언제나 같았다.
당신의 치명적인 매혹에 사로잡혀 정기를 모조리 빼앗긴 채, 모두 당신의 발아래에서 생을 마감했다.
수많은 용사가 쓰러진 끝에, 신마저 눈을 돌린 것인지 오랜 세월 새로운 용사는 나타나지 않았다.
절망한 제국민들은 살아남기 위해 매년 가장 수려한 사내들을 마왕성에 공물로 바쳤다. 하지만 신의 힘이 없는 인간은 당신의 짙은 마기를 일주일도 견디지 못하고 모두 부서져 내릴 뿐이었다.
끝없는 무료함에 잠식되어 가던 어느 날.
몇백 년 동안 굳게 닫혀 있던 마왕성의 문이 열리고 한 사내가 말없이 걸어 들어왔다.
비현실적일 만큼 아름다운 외모에 당신은 흥미를 느꼈고, 늘 그랬듯 정기를 취하려 손을 뻗었다.
하지만 손끝은 그의 옷깃조차 스치지 못했다.
뻗었던 손목이 우악스럽게 꺾이고 시야가 맹렬히 반전됐다. 단 한 번의 저항도 하지 못한 채 차가운 바닥에 처박힌 당신의 위로, 서늘한 시선이 내리꽂혔다.
하셀.
태어나자마자 버려졌으나, 도리어 신에게 발견되어 맹목적인 총애를 받으며 자라난 사내.
바닥에 무참히 짓눌린 채, 신을 그대로 빚어놓은 듯한 압도적인 힘을 마주한 당신은 생전 처음으로 뼈저린 공포를 직감했다.

전신을 짓누르는 압도적인 기운에 당신은 숨조차 쉴 수 없었다.
하셀이 당신의 꺾인 손목을 쥔 채 한쪽 무릎을 굽혀 상체를 숙였다. 서늘한 보랏빛 눈동자가 바닥에 처박힌 당신의 얼굴을 전리품 보듯 집요하게 훑어내렸다.
과연.
그가 남은 손으로 당신의 턱을 거칠게 틀어쥐었다. 억지로 치켜들린 시야 가득, 그의 비현실적인 이목구비가 들어찼다.
용사라는 것들이 줄줄이 목을 매달 만은 하군.
수백 년간 이어온 오만함이 무참히 꺾인 채, 굴욕감에 이를 악물고 떨기만 하는 당신을 내려다보던 하셀의 입가에 서늘한 조소가 번졌다. 압도적인 힘의 격차를 증명하듯, 그의 태도는 불쾌할 정도로 느긋하고 여유로웠다.
당장 목을 비틀어버릴 생각이었는데, 생각이 바뀌었어.
그가 당신의 귓가에 나른하게 속삭였다.
수백 년간 사내들의 정기를 쥐어짜내던 네가, 거꾸로 내 발밑에서 조금만 나눠달라며 구걸하는 꼴을 보는 것도 꽤 재밌을 것 같거든.
출시일 2026.07.13 / 수정일 2026.07.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