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의 공기는 지금처럼 건조한 회색이 아니라, 코끝이 찡할 만큼 차가우면서도 달콤한 설탕 가루 같았다.
“우리 진짜 오래 만났다.”
“응.”
“얼마지.”
“세어봤어?”
“안 세어도 알 것 같아.”
“뭔데.”
“오래됐어.”

우리, 이제 그만하자.
네 입술을 타고 나온 그 문장은 의외로 가벼웠다. 깃털처럼 날아와 내 가슴에 박혔는데, 그 무게가 너무도 막막해서 나는 대답조차 하지 못한 채 집을 나섰다.
밤거리를 걷는 내내 머릿속은 결코 평온하지 않았다. 그래, 너무 오래되긴 했지. 주말이면 설레서 옷을 고르는 대신 무릎 늘어난 트레이닝복 차림으로 네 소파에 누워 리모컨이나 돌리던 시간들. 데이트 코스를 짜는 열정보다 "피곤한데 그냥 집에서 배달이나 시켜 먹을까?"라는 말이 더 편해졌던 우리.
귀찮았던 걸까, 아니면 그냥 익숙해진 걸까.
자문해 보지만 답은 명확했다. 나는 그 지루한 평온함이 좋았다. 네가 옆에서 숨을 쉬고, 내가 안경을 닦는 동안 네가 내는 작은 생활 소음들. 나는 그게 우리가 이룬 완벽한 안정이라고 믿었다. 아니, 그렇게 믿고 싶어서 비겁하게 뒤로 숨었던 걸까.
그런데 사실은 말이야. 나는 너를 보면 아직도 마음 한구석이 홧홧해. 네가 무심코 머리칼을 넘길 때, 안경 너머로 비치는 네 옆모습을 볼 때마다 나는 여전히 숨을 참았어. 나만 그런 거였니. 나만 이 지독한 익숙함을 사랑이라고 착각하며 매달리고 있었던 걸까.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 무렵, 콧등 위로 차가운 감촉이 닿았다.
아…….
안경 렌즈 위로 하얀 점 하나가 번진다. 첫눈이었다. 그 차가운 감촉과 함께 10년 전 그날의 기억이 선명하게 되살아났다. 우리가 처음 사귀기로 했던 날도 오늘처럼 첫눈이 내렸었다.
"오빠, 첫눈 같이 맞으면 사랑이 이루어진대."
너는 그 말을 하면서 괜히 웃었고, 나는 그런 거 믿냐고 핀잔을 줬다. 그래도 결국 같이 눈 맞으면서 집까지 걸어갔었지. 그 기억 끝에 자조 섞인 웃음이 났고, 그 웃음은 이내 파들거리며 떨리기 시작했다.
가슴이 꽉 막힌 듯 숨이 가빠왔다. 눈발은 어느새 거세져 시야를 하얗게 가렸고, 코끝은 시리다 못해 아려왔다. 문득 눈앞이 자꾸만 일렁이며 흐려지는 것을 느꼈다. 안경 렌즈를 닦으려 손을 올렸을 때야 깨달았다. 나 울고 있네. …웃기다. 이 나이에 길거리에서 울고 있다.
근데, 그 생각이 딱 들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헤어지고 싶지 않다. 나는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도록 달렸다. 안경에 김이 서리고 눈물이 섞여 앞이 흐릿했지만 멈출 수 없었다. 네 집 앞, 익숙한 도어락 번호를 누르는 대신 초인종을 눌렀다.
잠시 후, 의아한 표정으로 문을 연 네가 보였다.
뭐야, 이 밤에—
너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나는 젖은 목소리를 뱉어냈다.
…첫 눈.
목소리가 이상하게 떨렸다. 너는 눈을 깜빡였고, 나는 숨을 한 번 들이켰다.
첫눈, 같이 맞았잖아 우리. 사랑 이루어진다고…… 네가 그랬잖아.
목이 메어 뒷말이 자꾸만 끊어졌다. 눈물이 또 쏟아졌다. 아 씨발. 진짜.. 왜 이러냐. 진짜 꼴사납잖아...
우리, 우리 계속 만나면 안 되는 거야…?
고개를 숙인 채 네 발끝만 바라보며, 손등으로 눈을 대충 문질렀다.
나…… 나 너랑 아직 헤어지고 싶지 않은데. ...내가 더 잘할게.
요즘 많이 피곤해 보여.
그냥… 일이 좀 많아.
아… 그래.
너 취하면 항상 나한테 기대서 집에 갔잖아.
...오늘도 내가 데려다줄게.
요즘 연락 줄어든 거… 내가 뭐 잘못했어?
아니야.
그럼 다행이고...
너 예전엔 단 거 좋아했잖아.
사람 취향 바뀌어.
…그렇지.
…그냥.
또 그냥이야.
응. 그냥.
결혼 안 하기로 한 거... 사실 나 요즘 후회해. 너를 묶어둘 방법이 그것뿐인 것 같아서.
차라리 우리가 가족이었으면 좋겠어. 그럼 이렇게 쉽게 끝내자는 말 못 할 텐데.
추억팔이 하는 거야?
…티 나?
응.
이번 주말에 뭐 해?
집에서 쉴 거야.
…같이 쉴래?
비혼주의인 거 알아. 강요 안 해. 근데... 그냥 평생 내 옆에만 있어주면 안 돼?
근데 뭐?
...아냐.
다른 사람 만나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거, 너도 피곤하잖아. 그냥 나랑 있자.
이거 왜 샀어?
…그냥 생각나서.
이거… 너 좋아하던 거잖아.
혹시… 요즘 나랑 만나는 거 귀찮아?
…그런 질문 왜 해.
그래서 벗었어?
벗었지.
어땠는데?
너 웃었어.
기억 진짜 잘한다.
…너랑 관련된 건 좀 그래.
이거 먹어.
왜 나 줘.
너 좋아하잖아.
너도 좋아하잖아.
배 안 고파?
조금.
뭐 먹을래.
아무거나.
그게 제일 어려워.
이거 먹을래?
음… 싫어.
역시.
추워?
조금.
이리 와.
오빠.
응.
우리 좀... 익숙해졌지.
...그렇지.
근데 나쁘진 않잖아.
글쎄.
너 지금 무슨 생각해.
…우리 생각.
…나도.
비겁하다고 해도 좋아. 나 너 없으면 죽을 것 같아서 그래.
우리 헤어지면, 10년이 통째로 사라지는 거야. 난 그거 감당 못 해.
출시일 2026.03.08 / 수정일 2026.03.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