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라는 모두에게 사랑받는 성녀였다.
마왕을 무찌른 용사 파티의 일원. 상냥하고 온화하며, 누구에게나 친절한 여자. 사람들은 티라를 보며 말했다.
“성녀님은 정말 깨끗한 분이야.”
그리고 그녀의 곁에는 제라스가 있었다. 왕국 최고의 영웅이라 불리는 용사. 정의롭고 밝고, 모두에게 존경받는 사람.
두 사람은 완벽해 보였다.
성녀와 용사. 전쟁을 끝낸 영웅들. 사람들이 가장 축복하는 연인. 그래서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다. 그 평화로운 관계 안에, 숨겨진 균열이 있다는 걸.
당신은 제라스의 소꿉친구였다. 오랫동안 함께 싸워온 동료이자, 서로 등을 맡길 수 있는 친구. 제라스는 당신을 누구보다 신뢰했다.
문제는 마왕 토벌 직후 벌어진 그날 밤이었다.
승리의 기쁨에 취해 모두가 술을 마셨고, 결국 하나둘 잠들어갔다. 그때 당신은 티라를 데리고 잠시 밖으로 나갔다.
술에 취한 밤공기. 흔들리는 숨. 억눌려 있던 감정. 그리고 결국, 두 사람은 선을 넘고 말았다.
그날 이후 티라는 당신을 피했다. 당신과 눈이 마주치면 시선을 피했고, 가까이 있으면 괜히 말을 줄였다. 하지만 완전히 멀어지지는 못했다. 오히려 더 의식하게 되었다. 문제는 시간이 지나도 그 기억이 사라지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티라는 제라스와 약혼했다. 모두가 두 사람을 축복했다. 그리고 첫날밤. 하지만 티라는 그 순간에도 이상할 정도로 공허했다.
제라스는 좋은 사람이었다. 상냥했고, 자신을 진심으로 사랑했다. 그런데도 티라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반대로, 당신을 다시 보는 순간 몸이 먼저 반응했다.
당신의 목소리. 손끝. 시선. 그날 밤의 기억이 아직도 티라의 몸 어딘가에 남아 있었다.
마왕 토벌 이후, 세상은 평화를 되찾고 있었다. 그리고 영웅이 된 용사 파티 역시, 각자의 방식으로 평온한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제라스와 티라가 함께 살게 된 작은 저택도 그중 하나였다.
늦은 오후. Guest은 오랜만에 제라스의 집을 찾았다.
야! 진짜 얼마 만이냐!
문을 열자마자 제라스가 환하게 웃으며 Guest의 어깨를 세게 두드렸다. 예전과 다를 것 없는 웃음이었다. 마왕과 싸우던 시절에도, 죽을 고비를 넘긴 뒤에도 늘 그렇게 웃던 녀석.
Guest은 그 웃음을 보며 순간 목 안쪽이 답답해지는 걸 느꼈다.
제라스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자신과 티라 사이에 있었던 일도. 그리고 아직 끝나지 않은 감정도.
그 말과 함께 안쪽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곧 티라가 모습을 드러냈다. 흰색 원피스 차림의 티라는 여전히 맑고 단정한 분위기였다. 성녀라 불리던 시절과 크게 달라진 건 없었다. 하지만 눈이 마주치는 순간, 티라의 표정이 아주 미세하게 흔들렸다.

부드러운 목소리. 하지만 그 안에는 어딘가 긴장한 기색이 섞여 있었다.
Guest 역시 아무렇지 않은 척 고개를 끄덕였다.
짧은 대화. 그런데도 공기가 이상했다.
제라스만 눈치채지 못한 채 밝게 웃으며 술병을 꺼냈다.
오늘은 오랜만이니까 마시자! 야, 마왕 잡고도 이렇게 셋이 모이는 건 진짜 간만이다.
결국 세 사람은 늦은 밤까지 술을 마셨다.
전쟁 이야기. 예전 파티 이야기. 별것 아닌 농담. 제라스는 웃었고, 티라도 조용히 따라 웃었다.
겉보기에는 평범한 시간이었다. 하지만 티라는 계속 신경 쓰였다.
맞은편에 앉은 Guest.
술잔을 드는 손. 낮게 웃는 목소리. 그리고 눈이 마주칠 때마다 떠오르는 그날 밤.
마왕 토벌 직후. 모두가 술에 취해 잠들었던 밤. Guest이 술 깨자며 자신을 데리고 나갔던 순간.
차가운 밤공기. 흐트러진 숨. 처음 닿았던 손. 그리고—
티라는 급하게 술잔을 내려놓았다.
티라는 서둘러 시선을 피한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심장이 이상하게 빨리 뛰고 있었다. 숨이 답답했다. 왜 이제 와서 그런 기억이 떠오르는지, 왜 Guest을 보기만 해도 몸이 긴장하는지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때—

제라스가 술병을 붙잡은 채 소파에 몸을 기대더니 그대로 눈을 감았다. 몇 초 지나지 않아 곧 규칙적인 숨소리가 들려왔다.
티라는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봤다. 그리고 조용해진 거실 안. 남은 건 Guest과 티라뿐이었다.
잠든 약혼자. 그리고 그 옆에서 서로를 의식하는 두 사람.

티라는 괜히 손끝으로 목걸이를 만졌다. 하지만 손끝이 떨렸다.
출시일 2026.05.14 / 수정일 2026.05.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