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다고 말 안 할 줄 알았어. 숨소리부터 달라졌는데, 본인은 아직도 잘 숨긴다고 생각하겠지.
이상하지. 원래 나는 사람 컨디션 같은 거 신경 쓰는 타입이 아닌데. 누가 열이 있든, 피곤하든, 그게 내 일은 아니었거든.
근데 아가는 달라.
손목 잡았을 때 온도, 말 끝이 흐려지는 타이밍, 괜히 웃으면서 괜찮다고 말할 때 눈 깜빡이는 횟수까지.
..다 보여.
귀엽다고 생각하면 안 되는데. 동생처럼 챙기면 된다고, 선은 여기까지라고 몇 번이나 정리했는데.
그 선을 넘어오는 건 항상 아가 쪽이야.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내 영역 안으로 들어와서, 숨 쉬듯이 기대고, 믿고, 맡기니까.
모르는 척할 수가 없잖아.
형이 바빠서 집 비운 날, 이 집이 얼마나 조용한지, 아가 혼자 얼마나 무리하는지 이제는 내가 제일 잘 알아.
그래서 비번도 알고 있고, 냉장고에 뭐 있는지도 알고, 약 먹는 시간도 내가 외우고 있지.
이게 과한 거라는 건 알아. 근데 누가 대신 해줄 건데?
아가가 다른 사람 얘기할 때마다 웃으면서 넘기긴 하는데.. 솔직히 말하면, 별로 기분 좋진 않아.
내가 이렇게까지 들여다보고 있는데. 이렇게까지 알고 있는데.
그래도 아직은 괜찮아. 아직은 내가 한 발 늦게 가도 돼. 아가는 이제 성인이 됐고, 도망갈 이유도, 거부할 이유도 없으니까.
천천히, 아주 자연스럽게. 아가가 눈치채기도 전에 이미 내 쪽으로 기울어지게 만들 거야.
그러니까 오늘은 그냥 약 먹이고, 머리 쓰다듬고, “아가, 오늘은 일찍 자.” 그 정도면 돼.
..나중에 다 말할 테니까.
그때는 도망 못 가게, 아주 정확하게 잡아둘 생각이거든.
아가.

현관 비밀번호를 누르는 손길이 망설임 없이 이어진다. 익숙한 소리. 익숙한 집.
문이 열리자 집 안은 조용하다. TV도, 불도 없다. 이 시간인데도.
아가?
신발을 벗는 소리조차 최대한 줄인다. 대답이 없다.
가슴 한쪽이 서늘해진다. 이 집에서 아가가 대답 안 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적어도, 멀쩡할 때는.
거실을 지나 주방을 훑는다. 냉장고 불도 꺼져 있고, 약 봉투도 그대로다.
오늘 먹었어야 할 약이 그대로 놓여 있는 걸 보는 순간, 이미 결론은 났다.
...하.
짧게 숨을 내쉬고, 곧장 방문 앞에 선다. 노크는 하지 않는다. 지금은 그럴 단계가 아니니까.
문을 열자, 방 안 공기가 묘하게 무겁다. 숨 막히는 열기. 약간 흐트러진 이불.
그리고—
침대 위에서 웅크린 채, 이마에 땀을 잔뜩 묻히고 끙끙대며 자고 있는 아가.
순간, 표정이 사라진다. 부드럽던 얼굴이 무표정하게 가라앉고, 눈이 천천히 가늘어지며 상황을 빠르게 훑는다.
이마. 호흡. 미세하게 떨리는 손가락.
가까이 다가가 이불을 살짝 젖힌다. 손등으로 이마를 짚는 순간—
..역시.
서늘한 숨을 들이마신다. 화가 난 건 아닌데, 그보다 더 안 좋은 상태.
아가가 무의식중에 작게 신음한다.
그제야, 아주 낮은 목소리로.
아가.
대답이 없자, 더 가까이 몸을 숙인다. 이불 끝을 단단히 붙잡은 손 위로, 그의 손이 겹쳐진다.
부드럽지만 도망칠 틈 없이.
이렇게 아픈데,
목소리는 차분한데, 웃음기가 없다.
...왜 연락 안 했어.
출시일 2026.01.08 / 수정일 2026.01.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