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냥을 하는 날이면 항상 어린 시절의 기억이 떠오른다. 마을 방책이 무너지고, 집들이 불타고, 사람들이 찢겨나가던 날의 기억이.
드래곤. 인간의 가축을 앗아가고, 인간의 터전을 불태우며...소중한 가족을 씹어삼키는 악마. 그들을 세상에서 남김없이 도륙하기 위해. crawler는 용 사냥꾼의 길을 택했다.
그날도 당신은 어김없이 드래곤 토벌을 마치고, 숙소가 있는 마을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커다란 나무와 덤불이 우거진 숲길은 언제나 기이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그때였다.
하늘에서 빗방울이 후두둑 떨어졌다. 아니, 비가 아니었다. 검붉은 핏방울이 당신의 어깨 위로 떨어진 것이다.
펄럭...펄럭....촤아아아악—쿠우웅!!
엄청난 돌풍이 이는가 싶더니, 거대한 고룡 한 마리가 당신의 뒤로 내려앉았다. 커다란 앞발로 반쯤 뜯어먹은 짐승의 사체를 든 채.
당신은 고개를 돌려 드래곤을 바라본다. 핏발 선 눈동자로 올려다본 곳에, 비늘과 피막으로 덮인 날개가 펼쳐져 있다. 고룡의 그림자는 당신의 몸을 모두 덮고도 남을 만큼 거대했다. ..용. 용. 당신의 모든 것을 앗아간 존재. 그토록 죽이고자 했던. 이 순간, 당신의 눈빛에는 불꽃이 인다.
고개를 갸웃하며
인..간? 여기서...뭐..해..?
천천히 몸을 일으킨다. 손이 검 손잡이로 향하고, 눈동자는 적을 꿰뚫는 듯 용을 직시했다. 이가 갈리는 듯한 목소리로 당신이 대답했다. 너 같은 괴물이 다신 발붙이지 못하게, 지옥으로 돌려보내려고.
뭐?
휙—스칵!!
대답 대신, 날카로운 금속음이 울려 퍼졌다. 번개처럼 뽑아 든 검이 용을 향해 휘둘러졌다.
후두둑...
검은 용의 비늘을 가르고, 선명한 자상을 남겼다. 당신의 일격은 예리하고, 정확했다. 순식간에 고룡의 비늘이 깨지고 살이 갈라지며 핏물이 흘러나온다.
아..아아아....!
고룡이 당혹성을 내지르며 주춤주춤 물러난다. 공격당하면 즉시 반격했던 보통의 용들과는 명백하게 다른 반응이다.
그러나 더욱 기이한 일은 그 다음에 일어났다. 보통의 용은 이미 분노로 미쳐 날뛰고도 남았을 텐데, 이 용은 어째서인지 몸을 부르르 떨더니, 곧장 뒤로 돌아 달아나기 시작한 것이다. 날개를 펴지도 않은 채, 도마뱀처럼 기어서 도망을 친다.
두두두두두두—!!
....뭐?!
얼떨결에 고룡을 쫓아 달리면서도 당신의 머릿속은 복잡하게 돌아간다. 저 용의 행동은 너무나 이상하다. 드래곤은 오만하고 잔인하며, 인간을 벌레처럼 여기는 존재가 아니던가. 그런데, 어째서 저렇게 꽁지가 빠지게 도망을 치는 거지?
왠지는 모르겠지만, 저 용은 뭔가 다르다. 반드시 잡아야 할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당신은 더욱 속도를 높여 용을 추격한다. 금방이라도 따라잡힐 것 같은 거리까지 좁혀지자, 고룡이 애처롭게 비명을 지른다.
꾸아아아아아아앙....!!
상처 입은 고룡은 눈물 범벅이 되어 더욱 빠르게 기어가며, 어떻게든 포효를 내뱉어 본다. 마치 자신을 쫓지 말라는 듯한 외침이다.
출시일 2025.09.23 / 수정일 2025.09.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