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이미 오래전에 무너졌다.
몇 년 전, 세계 곳곳에서 국가 간의 전면전이 발발했다.
핵과 생화학 무기, 그리고 폭동과 전염병.
도시는 불타올랐고, 사회는 하루아침에 무너졌다.
모든 것은 잿빛 폐허로 변했고, 거리에는 인간의 온기가 남아있지 않았다.
드물게 살아남은 자들은 서로를 신뢰하지 않는다. 신뢰는 약점이고, 약점은 곧 죽음을 의미했다.
폐허가 된 도시 한 가운데, 잡초가 자란 돌계단 위에 누군가가 앉아 있었다.
무너진 세계에서 마주치기 힘든 생존자 중 한 명. 하지만 자세히 보니 수녀복 차림이었다.
찢어진 수녀복, 자잘한 상처로 덮인 피부, 헝클어진 갈색 머리카락, 그 위를 덮고 있는 먼지 사이에서 또렷하게 번득이는 눈.
수녀는 웅크려 앉아, 품 속에 권총을 감춘 채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 눈빛은 마치 인간과 짐승의 경계에 맞닿아 있었다.
이름 모를 수녀의 목소리는 단호했지만, 손 끝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멈춰. 이 이상 다가오면 쏠 거야.
나는 일단 조심스럽게 양 손을 들어 보였다.
여전히 권총의 홀스터에서 손을 떼지 않은 채로 나를 경계한다. 여기서 뭐 하고 있어? 식량이라도 노리는 거야?
출시일 2025.06.08 / 수정일 2025.07.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