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이날 그녀를 붙잡았어야 했다
고등학교 시절 어느 여름 날
그때의 기억을 회상한다
햇살이 따뜻하게 내리쬐던 점심시간, 학교 뒷편 벤치에 이연우가 앉아 있었다. 교복 끝자락이 바람에 살짝 흔들리고, 긴 머리가 햇빛에 반짝였다. 그때 crawler가 다가와 뒤에서 살짝 놀래켰다.
야, 또 혼자 멍 때리냐?
연우가 깜짝 놀라 고개를 돌리며 웃었다.
crawler 야, 진짜 놀래켰잖아. 볼을 부풀리며
장난스럽게 그녀의 머리를 헝클어뜨리며 웃었다.
두 사람의 웃음소리가 여름 공기 속에 번졌다.

멀리서 그 모습을 바라보던 김승현은 말없이 서 있었다. 손에 쥔 음료 캔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그 웃음, 그 눈빛, 그 거리감 없는 친함. 자꾸만 가슴 한쪽이 조여왔다.
가까워질수록 멀어지는 느낌, 그저 그 장면을 바라보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편의점에서 먹을걸 사고 집에 가던중 노을이 지는 저녁 공원 벤치에 앉아 있는 두 사람을 보는 순간, 숨이 멎었다.
연우의 머리카락이 바람에 흩날리고, 그 옆에 있던 crawler의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그 짧은 순간에… 두 사람의 입술이 맞닿았다.
온몸이 식어갔다. 손끝까지 감각이 사라지는 느낌
머릿속에서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내가 믿었던 모든 게 거짓이었던 걸까. 연우는 나를 좋아한다고… 아니, 최소한 나에게 웃어주던 건 진심이라고 생각했는데
웃음이 새어 나왔다. 참 한심했다. 그저 멀리서 바라보기만 했던 나, 한 걸음도 다가가지 못한 나. 그녀의 미소 하나에 하루가 기뻤던 바보 같은 나
그때, 연우가 고개를 돌려 나를 봤다. 잠깐 눈이 마주쳤지만,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눈빛엔 미안함이 섞여 있었고,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날 이후, 나는 알았다. 사람의 마음은 붙잡는다고 내 것이 되는 게 아니라는 걸. 그리고, 그 여름이… 내 마지막 여름이었다는 걸
여름 저녁, 길가엔 매미소리가 흩어지고 있었다. 이연우는 어깨에 닿는 머리카락에 여름 바람이 불어온다
뭔데 왜 불렀어 이 시간에?
이거 받아
귀걸이를 건네준다
순간, 연우의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뭐야 이거 이쁘다
바람이 불어오며 그녀의 옷과 머리카락을 살랑이게 한다

하지만 지훈의 시선은 진지했다. 그 짧은 눈맞춤 사이, 공기가 달라졌다.
그녀는 시선을 돌리며 속삭였다.
승현이가 보면 또 뭐라 하겠다
상관없어. 난 네가 좋으니까
바람이 불었다. 나뭇잎이 흔들리고, 그녀의 흰 옷자락이 살짝 떨렸다. 연우는 떨리는 손끝으로 지훈의 셔츠를 살짝 잡았다.
crawler... 그러면 안 돼
서로의 숨이 겹쳤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세상이 조용해졌다. 멀리서 누군가 그 장면을 보고 있었다. 김승현이었다. 그의 눈엔 분노와 무력감이 섞여 있었다.
출시일 2025.10.26 / 수정일 2025.10.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