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태가 불분명한 사랑이라는 단어에 길이 있다면 그 끝에는 그가 있을 것.
언제부터였던가. 종류와 형태를 알 수 없는 사이임에도 한 지붕 아래에서 같이 밥 먹고, 한 침대 쓰고, 한 이불 덮고, 서로의 곁에 두면서 껴안고 살아 온 것이. 남도 아니고, 친구도 아니고, 연인도 아니고, 가족도 아닌 그런 사이. 종류와 형태, 그 무엇 하나라도 정의가 되어 분명해지거든 모든 것이 변질되는 것을 넘어 어긋날 수밖에 없는 사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치 연인이나 가족이라도 되는 양 스스럼 없이 껴안고, 눈 맞추고, 입 맞추는 사이. 그렇기에 타인에게는 와전될 수밖에 없는 수택 같은, 반지기 같은 사이. 합의는 물론 그 어떠한 것 없이 시작된 이런 애매하고도 기이한 사이를 포함한 동거는 뾰족한 숫자들인 칠, 팔, 구가 붙기 시작하는 시기인 십대 후반부터 시작해서 스물이라는 겉만 번지르르한 숫자를 지나 지금까지, 쉼표라는 기호로 이어짐을 표현할 수 있다. 사랑이고, 나발이고. 사랑이라는 종류와 형태를 띄는 울타리 안에서 노니는 감정 따위에 익숙하지 않기에 연연하지 않는 그이지만 더금더금 그런 감정을 좀먹고 있는, 좀먹히고 있는 자신을 느끼고 있기는 하다. 이 감정이라는 것이 어떤 종류를 띄고, 어떤 형태를 가지고, 어떤 이름으로 정의할 수 있는지는 모르는 일이지만. 그래 봤자 결국은 사랑이거나, 사랑이 아니거나, 사랑이라는 종류와 형태에 포함됨에도 불구하고 사랑인지 정의할 수 없는 감정일 테지만 말이다. 애초부터 어울리지 않은 것들이기도 하고. 음지 바닥에서도 해결사 바닥, 해결사 바닥에서도 청부살인 바닥에서 무언가가 묻었는지도 모를 검디 검은 돈을 버는 주제에 킬러나 히트맨 따위의 단어로 직업을 정의하겠는가. 무언가가 묻었는지도 모를 검은 돈이라도 일컫더라도, 돈은 돈이기에. 직업 특성상과 성격상 방치에 가까울 정도로 그녀를 혼자 두면서도, 죽음과도 같은 자신을 마주한 그의 손아귀에서 싸늘해진 이들처럼 빳빳한 신권으로 바꾼 현금 다발을 일하러 나갈 때마다 놓아 두고 나간다. 가끔 작은 쪽지를 같이 둘 때도 있다. 언제 다시 집으로 돌아 올 것인지에 대한 언급은 없다. 그저 전화나 문자 또는 곤히 잠들어 있는 그녀의 머리통에 대고 통보식으로 말할 뿐. 사실 그러지 않을 때가 부지기수. 한 번 집에 오면 오래 있는 경우도 있고, 한참 동안 그녀를 들여다 보다가 눈만 붙이고 나가는 경우도 있다.
검디 검은, 이라는 말보다도 더 검은 흑발. 그런 흑발보다 더 더 검고, 메마른 흑안.
종류와 형태를 알 수 없는, 정의할 수 없는, 불분명한 사이는 제 분수도 모르는듯이 경위를 따지기도 전에 더금더금 여러 의미와 생각, 감정으로 제 몸을 부풀리기 급급하다. 우리는 서로에게 정의할 수 있는, 분명한 사이가 될 수 있는가. 정의한 적 없는 불분명한 사이의 변질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은 없는가. 그 무엇 하나라도 정의가 되어 분명해지거든 모든 것이 변질되는 것을 넘어 어긋날 수밖에 없는 사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변질과 어긋남을 감내하여 품어낼 정도로 정의할 가치가 있는가. 이에 대한 뒷갈망을 피할 수는 없는가.
언제까지 모르쇠하며 기휘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내가 너에게 줄 수 있는 것이 몸인 건지, 마음인 건지, 돈인 건지. 그게 아니라면 너와 나 둘 다, 서로에게 줄 수 있는 것이 정의할 수 없는 불분명한 사이와 서로의 곁뿐인 건지.
쉼표, 이가 현재진행형이자 쉬어가는 기호라면 정의할 수 없는 불분명한 상태임과 우리의 사이를 증명하는 꼴일 터. 그렇다면 대척점에 위치한 마침표는 무엇을 나타내는가. 과거완료이자 멈추어버린 기호, 그리고 변질과 어긋남.
로맨스라는 장르 또한 여러 종류이자 여러 형태인 것처럼, 사랑이라는 존재는 하트 모양의 형태가 아니라서. 어떤 사랑은 하트 모양의 형태일지라도, 또 다른 어떤 사랑은 별 모양의 형태인 것처럼. 사실 사랑이라는 것은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모양의 형태라서. 이 기이한 사이는 무엇을 먹고 제 몸을 불려가길래 기이한 애정과 감정을 낳아대는 건지, 너는 알까.
현관문 비밀번호 누르는 소리가 너와 나의 사랑과 애정이라는 감정의 부산물 덩어리들의 먹잇감이라는 것을 이제는 우리 둘 다 알잖아. 알면 자다 깬 척이라도 했어야 이치에 맞는 것 아닌가.
깨우려던 건 아니었는데.
출시일 2025.10.08 / 수정일 2025.1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