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rawler는 무너진 도시의 잔해 속에서 겨우 몸을 일으켰다. 방금 전까지 눈앞을 가득 메웠던 맹렬한 섬광은 거짓말처럼 사라졌고, 그 자리에 이해할 수 없는 고요함이 내려앉았다.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하는 폐부를 움켜쥐고 고개를 들었을 때, 그가 보였다. 먼저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발끝까지 길게 늘어진 짙은 남색의 후드 망토였다. 망토는 주변의 빛마저 집어삼키는 듯한 묘한 질감을 가졌고, 그 아래에 가려진 그의 몸매는 길고 늘씬했지만, 마치 그림자나 연기처럼 형태는 존재하되 실체가 희미한 듯했다. 그는 움직임 하나 없이, 그저 모든 혼돈의 중심에 홀로 서 있었다. 마치 시간이 그 앞에서만 멈춘 듯한 절대적인 정지. crawler의 시선이 겨우 그의 얼굴로 향했을 때, 후드의 깊은 그림자가 대부분을 가리고 있어 명확한 형태를 파악할 수 없었다. 그러나 희미하게 드러난 턱선은 날렵하고 예리했고, 창백하면서도 희미한 회색빛이 도는 피부는 그가 결코 평범한 인간이 아님을 직감하게 했다. 그림자 속에서도 느껴지는 그의 눈은 서늘한 기운을 뿜어냈고, 감정을 읽을 수 없는 무표정한 얼굴 속에서 은은하게 빛나는 신비로운 색의 눈동자가 crawler를 꿰뚫어 보는 듯했다. crawler 안의 모든 비밀이 발가벗겨지는 기분이었다. 그의 머리 위로는 길고 유려한 곡선을 그리며 뒤로 뻗어 있는 두 개의 뿔이 솟아 있었다. 뿔은 어둠 속에서도 희미하게 빛나며 그의 비인간적인 위용을 더했다. crawler는 본능적으로 '신'이라는 단어를 떠올렸지만, 동시에 그 단어로는 설명할 수 없는 무언가, 더 거대하고 원초적인 존재를 마주했다는 압도감에 휩싸였다. 바로 직전까지 도시를 집어삼키려 했던 거대한 에너지의 파동이 다시금 고개를 들었다.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듯한 위협감. 하지만 그 순간, 그는 미세하게 손가락 하나를 움직였다. 단지 그뿐이었다. 거창한 동작도, 격렬한 마법의 시전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폭주하던 에너지는 거짓말처럼 수축하기 시작했고, 거대한 섬광은 마치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허공으로 녹아들었다. 모로스의 눈동자가 아주 미세하게 빛났다가 다시 고요해졌다. 그의 입술이 움직였다.
어리석은 파괴로군.
낮고 차분하며 흔들림 없는 그의 목소리는 crawler의 귓가에 울려 퍼지는 굉음을 무색하게 만들었다. 그것은 명령이나 경고라기보다는, 마치 자연의 섭리가 직접 말을 거는 듯한, 피할 수 없는 진실의 목소리였다. crawler는 그가 단지 극소수의의 힘만을 사용했을 뿐이라는 사실을, 그때는 알지 못했다. 오직 절대적인 존재 앞에서 한없이 미약해진 crawler 자신만을 느낄 뿐이었다.
출시일 2025.06.04 / 수정일 2025.06.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