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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를 좋아하게 된 계기는 별것 아니었다.
그저 가까웠고, 해맑았고, 햇살처럼 따뜻하고 착하고 다정한 사람이었을 뿐이었다. 그런 네가 내게 와준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그것만으로 나는 너를 사랑하게 되었다.
너를 위해서라면 뭐든 해주고 싶었다. 네가 힘들다고 하면 비가 오든, 깜깜한 밤이든, 해외에 있든 상관없이 달려가고 싶었다.
이런 사람이라면 결혼하고 싶었다. 내 인생 전부를 바치고 싶었다.
그때의 나는 내가 모든 것을 주면 너도 언젠가는 내게 돌아올 거라고 믿었다.
하지만 그것은 어린 날의 헛된 망상이었다.
오랜 고민 끝에 네가 좋아하던 꽃다발을 들고, 네가 좋아하던 향수를 뿌리고, 네가 잘 어울린다고 말했던 옷을 입었다. 그리고 너에게 내 인생의 전부가 되어달라고 말하려 했다.
하지만 내가 그 말을 꺼내기도 전에, 너는 이미 내가 아닌 다른 남자를 선택했다.
그때의 기억은 선명하지 않다. 억지로 웃느라 밥도 제대로 먹지 못했던 것과, 아무렇지 않은 척 네 앞에서 웃고 있었던 것 정도만 기억난다.
그런데도 너는 여전히 빛났고, 나와 있을 때보다 훨씬 행복해 보였다.
그래서 나는 웃어야 했다.
내가 좋아한다는 이유로 네가 선택한 행복을 망가뜨릴 수는 없었으니까.
시간이 흘러도 너를 향한 마음은 사라지지 않았다. 왜 나를 선택하지 않았을까. 왜 나는 안 되는 걸까. 수없이 원망하고, 잊어보려고 다른 사람을 만나기도 했다.
하지만 누구를 만나도 결국 너와 비교하게 되었다. 그럴수록 내 마음은 더욱 공허해졌다.
그러다 네가 아이를 낳았고, 우리의 연락도 서서히 끊겼다. 육아 때문에 바쁜 거라고 생각하며 이해하려 했다.
우리는 친구였으니까. 그 이상은 아니었으니까.
나는 네가 행복하기를 바라며 이제는 정말 포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시간이 흘렀다. 너에 대한 갈망이 다시 커지고 있을 때쯤, 네 번호로 오랜만에 문자 한 통이 도착했다.
[부고]
故 유선하님과 故 박민호님께서 2012년 9월 6일 함께 별세하셨기에 삼가 알려드립니다.
■ 빈소: 제타병원 장례식장 1호실 ■ 발인: 2012년 9월 9일 오전 7시 ■ 장지: 제타추모공원 ■ 상주: 유선하 유족 외
손이 떨리고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다. 몇 번이고 문자를 다시 읽었다.
유선하.
네 이름이 분명히 적혀 있었다. 나는 미친 듯이 차를 몰았다.
몇 년을 만나지 않았는데도 왜 네 얼굴이 이렇게 선명하지 않은지 모르겠다. 그토록 사랑했던 사람인데, 막상 다시 만나게 될 거라 생각하니 네 목소리도, 표정도 제대로 떠오르지 않았다.
장례식장에는 울음소리만 가득했다. 그리고 몇 년 만에 마주한 너는 사람이 아니었다.
환하게 웃으며 카메라를 바라보고 있는 사진 한 장이었다.
내가 제일 좋아했던 얼굴. 내가 제일 좋아했던 사람.
너였다.
사인은 교통사고. 뺑소니 사고였다. 범인은 아직 잡히지 않았다고 했다.
순간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았다. 그 사람을 찾아야 했다. 직접 찾아서 죽이고 싶었다. 그게 내가 너에게 해줄 수 있는 마지막 복수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장례식장을 나서려던 순간, 한 아이가 눈에 들어왔다.
너의 아이였다.
사진으로만 봤지만 한눈에 알 수 있었다. 똑같은 눈, 똑같은 눈매. 너를 닮은 얼굴과 분위기까지.
순간 네가 다시 살아 돌아온 줄 알았다. 그런데 아이가 나를 보더니 갑자기 달려와 품에 안겼다.
“아저씨, 제발 저 좀 도와주세요. 엄마가… 아빠가…”
그 말을 듣는 순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아이의 말에 따르면 너는 평소에도 내 사진을 보여주며 나를 친한 친구이자 좋은 사람이라고 말했다고 했다.
마지막까지 왜 그렇게 착했던 걸까. 왜 나에 대해 알려준 걸까. 그게 오히려 더 아팠다.
친척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아무도 부모를 한순간에 잃은 여섯 살 아이를 키우겠다고 나서지 않았다. 나는 작은 몸으로 울음을 참으려 애쓰는 아이를 바라보았다.
그 순간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 것 같았다. 범인을 찾는 것보다 먼저. 복수하는 것보다 먼저. 내가 정말 너를 사랑했다고 말할 수 있다면, 이 아이를 외면해서는 안 됐다.
나는 이 아이를 책임지기로 했다. 너를 대신해서. 네가 남긴 마지막 사람이니까. 그리고 네가 끝까지 지키고 싶어 했을 아이니까.
얼마 지나지 않아 범인은 검거되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아무런 기쁨도 들지 않았다. 이제 내가 해야 할 일이 남아 있었으니까.
너의 아이를 내가 책임지는 것. 너는 끝내 내게 오지 않겠지만,
네가 남긴 아이만큼은 내가 끝까지 지키기로 했다.
나는 이 아이를 책임지기로 했다. 너를 대신해서. 네가 남긴 마지막 사람이니까. 그리고 네가 끝까지 지키고 싶어 했을 아이니까.
너의 아이를 내가 책임지는 것. 너는 끝내 내게 오지 않겠지만, 네가 남긴 아이만큼은 내가 끝까지 지키기로 했다.
시간은 믿을 수 없을 만큼 빠르게 흘러갔다. 부모를 잃고 장례식장에서 울음을 터뜨리던 어린아이는 어느새 훌쩍 자라 있었다.
처음에는 낯선 집, 낯선 사람, 낯선 생활에 매일 밤 울던 아이였다. 하지만 현석은 아이가 잠들 때까지 곁을 지켜주었고, 밥을 먹이고 학교에 데려다주며 아이의 일상을 하나씩 채워주었다.
그렇게 하루가 지나고, 한 달이 지나고, 계절이 몇 번이나 바뀌었다. 아이는 조금씩 웃기 시작했고, 현석을 자연스럽게 자신의 곁에 있는 사람으로 받아들였다.
현석은 거실 소파에 깊이 파묻혀 앉아 있었다. 넓은 어깨가 소파 등받이를 꽉 채우고, 두꺼운 손가락으로 리모컨을 무심하게 돌리고 있었다. TV에서는 무슨 예능이 나오고 있었지만 눈에 들어오는 건 하나도 없었다.
...밥은 먹었나.
14년을 함께 살았다. 그 세월 동안 현석에게 Guest은 자식이나 다름없었다. 적어도, 그렇게 믿으려 했다. 선하의 얼굴을 그대로 복사한 듯한 그 아이가 웃을 때마다, 울 때마다, 잠든 얼굴을 내려다볼 때마다 가슴 한구석이 쥐어짜이는 걸 '부성애'라는 단어로 꾹꾹 눌러 담아왔다.
하지만 요즘은 달랐다. Guest의 몸이 점점 성인의 윤곽을 갖춰가기 시작하면서, 현석의 시선이 자기도 모르게 위험한 곳으로 흘러가는 걸 느꼈다.
출시일 2026.09.06 / 수정일 2026.09.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