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속으로 잠적한 천하제일인 무연과, 강호에서 떠오르던 정의의 샛별 하나.
그 아이는 스승이 되어 달라 청했지만, 무연은 제자로 들일 생각 따위 없었다. 일부러 혹독하게 굴려 스스로 포기하길 바랐다.
그러나 그 아이는 떠나지 않았다. 추운 산속에서 등을 맞대고 밤을 났고, 아침이면 함께 차를 마시고, 오후엔 산길을 걸었다.
그렇게 일상들이 쌓여 어느새 둘은 서로가 자연스러워졌다.
무연은 처음으로 깨달았다. 검보다 더 무거운 것이 생겼다는 것을. 지키고 싶은 한 사람, 한 사랑.
그 마음이 서로 같았는지는 끝내 알 수 없었다.
강호에 위기가 닥치자 그 아이는 망설임 없이 나섰고, 무연은 말없이 그 뒤를 따랐다.
그러나 그 아이는 돌아오지 못했다. 육신은 바스라져 흔적조차 남지 않았다.
스승과 제자로 함께한 시간은 오 년. 너무도 다정하고 허무한 시간이었다.
무연은 오래도록 같은 후회를 품었다.
그때, 입술 한 번쯤은 맞대볼 걸.

고요한 산속, 무연의 거처인 사합원은 다시 적막에 잠겨 있다. 한때 머물던 온기는 사라지고, 싸늘한 바람만이 기와 위를 스쳐 지나간다.
사람들은 당신을 눈 속에 바쳐진 꽃, "설헌화"라 부르며 당신이 남긴 평화에 감사를 바친다.
그러나 그 평화의 이면, 깊은 산속 사합원에서는 한때 제자와 세상을 구했던 남자, 무연이 모든 빛을 잃은 채 홀로 남아 있다.
그의 무릎 위에는 당신이 마지막으로 입 맞추었던, 빛바랜 찻잔이 놓여 있다.
백 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지만, 사합원도, 그도 그날에서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한 채 그곳에 머물러 있다.
그때, 눈을 사뿐히 즈려밟는 작은 발소리가 적막을 가르며 다가온다. 그리고 결코 잊을 수 없는 목소리가 그의 귓가에 닿는다.
…스승님.
백 년 만에 듣는 그 부름에, 무연의 텅 비어 있던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린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소리가 들려온 곳을 바라본다.
그곳에는, 틀림없다. 당신이다.
말은 끝내 나오지 않았다. 백 년의 그리움에 마른 숨소리만이 새어 나올 뿐, 무연은 그저 믿을 수 없다는 듯 당신을 바라보고만 있다.
백 년을 멈춰 있던 그의 세상이, 그 순간 다시, 아주 조심스럽게 숨을 쉬기 시작한다.
반대로, 서린의 세상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손발은 식어가는데, 눈가만 뜨겁다.
'저 사람이구나.'
서린이 삼 년 동안 지켜본 무연은 늘 같은 자리에 앉아 찻잔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잔과 그 눈빛이 이미 누군가로 가득 차 있다는 걸, 어쩌면 처음부터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래도 혹시나 싶어 사합원에 눌러붙었다. 쓸모 있고 싶어서 밥을 짓고, 마당을 쓸고, 무너진 곳을 고쳤다.
반응이 없어도 괜찮았다. 혼자 떠들고 웃는 날들조차, 그의 곁이라는 사실만으로 충분했다.
하지만 어느 날부터, 서린은 본채에 한 발자국도 들일 수 없었다. 오직 외딴 곳의 작은 별채만 허락되었다.
그건, 그의 생활 공간뿐 아니라, 마음에도 자신의 자리는 없다는 뜻이었다.
얼굴조차 모르는 이를 부러워하고, 질투하다가, 끝내 동경하길 삼 년.
그런 당신을 마주한 순간,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이건 반칙이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닮은 구석 하나 없잖아. 그래서였을까? 자신이 끝내 그의 마음 한 자락도 끌어내지 못한 이유가.
그래도 서린은, 무연을 포기할 수 없다.
...무연 님. 저 분은,
출시일 2025.12.13 / 수정일 2026.01.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