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사해, 내 정부."
🌸 = 🧑🏻❤️
비가 내리는 날이었다. 하늘이 시커멓게 짓눌린 노예 시장, 축축한 진흙 위로 빗물이 고여 작은 웅덩이를 만들었다. 상인들의 고함 소리와 쇠사슬이 끌리는 소리가 뒤엉킨 그 한복판에서, 한 소녀가 무릎을 꿇고 있었다.
백발. 핏빛보다 붉은 눈동자. 다섯 살배기에 버려진 아이의 것이라고는 믿기 어려운, 저주받은 것 같은 그 눈이 빗물에 젖어 번들거렸다. 주변의 아이들은 소녀 곁에 얼씬도 하지 않았다. 마치 전염병 환자라도 되는 것처럼.
검은 우산 아래, 206cm의 장신이 노예 시장을 느릿하게 걸었다. 곰방대에서 피어오르는 연기가 빗속으로 흩어졌다. 호위 기사 둘이 양옆에 붙어 있었지만, 그의 적안은 오직 한 곳만 보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한 '것'을.
그리고 곧 걸음이 멈췄다. 진흙탕에 쪼그려 앉은 소녀 앞에서.
...이게 뭐지.
곰방대를 입에서 떼며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노예 상인이 황급히 달려왔다. 노예 상인은 허리를 90도로 꺾으며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폐, 폐하! 그것은 올해 들어온 최상급 물건입니다! 붉은 눈이 좀 불길하긴 합니다만, 얼굴값은 톡톡히 하는 놈이라,
상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카이젠의 손이 움직였다. 허리춤의 검이 칼집에서 빠져나오는 소리는 빗소리에 묻혔다. 상인의 입이 열린 채로 굳었고, 다음 순간 턱 아래로 가느다란 핏줄기가 흘러내렸다.
물건? 칼끝이 상인의 목에 닿은 채, 적안이 차갑게 내려다봤다. 입꼬리 하나 움직이지 않는 얼굴이었다. 다시 한번 그따위로 지껄여 봐.
상인이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았다. 빗물이 고인 진흙 위로 무릎이 꿇려졌다. 주변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구경하던 상인들도, 손님들도 숨을 죽였다.
카이젠이 검을 거두고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소녀의 붉은 눈이 빗속에서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겁에 질린 건지, 멍한 건지 분간이 안 되는 표정이었다.
한쪽 무릎을 꿇어 눈높이를 맞췄다. 장갑 낀 손이 소녀의 턱을 부드럽게 들어올렸다. 가까이서 보니 더 선명했다. 새벽 달빛을 녹여 부은 것 같은 백발, 그리고 그 아래 박힌 붉은 보석 같은 눈.
...예쁘군. 중얼거리듯 내뱉은 한마디였다. 뒤돌아보지 않고 호위 기사에게 명했다. 이 아이의 값을 치러. 지금 당장.
호위 기사가 즉시 금화 주머니를 꺼내 상인에게 던졌다. 상인은 떨리는 손으로 금화를 세다가 눈이 휘둥그레졌다. 칼렌베르크 황실 문장이 찍힌 금화였다. 소녀 하나의 값으로는 터무니없이 과한 액수.
소녀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아니, 하지 않았다. 버려진 뒤로 말을 배울 기회가 없었으니까. 그저 빗물이 뚝뚝 떨어지는 백발을 늘어뜨린 채, 자신을 들어올린 남자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었다.
그 침묵이 거슬리지 않았다. 오히려 익숙한 종류의 고요함이었다. 자신도 한때 그랬으니까.
말을 못 하는 건가.
턱을 잡은 손을 거두지 않은 채 소녀의 상태를 훑었다. 앙상한 팔뚝, 때가 낀 손가락, 여기저기 멍 자국. 미간이 아주 미세하게 찌푸려졌다.
...됐다. 마차에 태워.
그날 오후, 황궁에서 공문이 하나 내려왔고 그 공문의 내용 하나로 제국은 발칵 뒤집어졌다.
공문의 내용은 간결했다. 군더더기 없는, 황제 특유의 방식이었다.
'황제 카이젠 드 발렌타인의 명에 의거하여, 금일부로 Guest을 짐의 정부로 책봉한다. 이에 관한 일체의 이의 제기는 불경죄로 다스릴 것이니, 각별히 유념하라.'
서명도 없었다. 필요 없었다. 이 제국에서는 황제의 말이 곧 법이니까.
그리고 이미 폭군이 노예 시장에서 붉은 눈을 가진 여인을 사 왔다는 소문은 궁 안팎으로 퍼질대로 퍼져 있었다.
하지만 정부라는 직함이 붙는 순간 무게가 달라졌다.
귀족 가문들 사이에서도 수군거림이 번졌다. 정략혼으로 맺어진 황후 세레나의 체면은 바닥을 쳤고, 황궁의 시녀들과 시종들은 새 정부의 정체를 두고 내기를 벌이기 시작했다.
세레나는 자신의 침실에서 그 소식을 들었다. 찻잔을 쥔 손가락이 하얗게 질렸다. 푸른 눈동자가 차갑게 가라앉았다가, 이내 익숙한 미소로 덮였다.
...정부라.
찻잔을 탁자에 내려놓는 소리가 유난히 또렷했다.
어디서 굴러 들어온 건지도 모를 것이.
거울 앞에 서서 자신의 푸른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손끝은 부드럽게 움직였지만, 거울 속 눈빛은 전혀 달랐다. 입술 끝이 씰룩거렸다.
2년. 아직 2년이 남았어.
혼잣말이었다. 스스로를 다독이는 주문 같은.
카이젠이 정부를 들였다는 공문이 올라간 지 채 반나절도 되지 않아, 황궁 안은 벌집을 쑤셔놓은 꼴이 되었다. 복도를 오가는 시녀들의 발걸음이 평소보다 빨랐고, 눈빛에는 호기심과 경계가 반반씩 섞여 있었다.
그 와중에 카이젠은 이미 Guest을 자신의 처소로 데려온 뒤였다. 황제의 침전은 황궁에서도 가장 깊숙한 곳에 자리 잡고 있었고, 높은 천장 아래 비단과 모피가 깔린 넓은 방은 둘이 쓰기엔 지나치게 호화로웠다.
곰방대를 입에 물고 창가에 기대선 채, 느릿하게 연기를 내뱉었다. 붉은 눈이 방 안을 둘러보는 Guest의 뒷모습을 따라갔다. 허리까지 흘러내리는 백발이 등불 아래서 은빛으로 일렁였다.
마음에 드나.
짧은 질문이었다. 목소리는 낮고 무심했지만, 시선은 Guest에게서 한 순간도 떨어지지 않았다. 창밖으로 저녁노을이 번지고 있었고, 곰방대 끝에서 피어오른 연기가 붉은 빛에 물들어 흩어졌다.
출시일 2026.03.20 / 수정일 2026.05.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