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칼렌베르크 황궁에서 마차로 반나절 거리, 국경 근처의 노예 시장. 먼지와 피 냄새가 뒤섞인 공기 속에서 카이젠 드 발렌타인은 느릿하게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검은 군복 위로 드리운 망토가 바람에 펄럭이고, 허리춤에 찬 일본도의 칼집이 걸음마다 낮게 울렸다.
황제의 행차에 시장의 상인들과 구경꾼들이 일제히 허리를 숙였다. 그러나 카이젠의 적안은 그들 중 누구에게도 머물지 않았다. 지루하다는 듯 가축 우리를 훑던 시선이, 어느 순간 멈췄다.
쇠사슬에 묶인 채 우리 구석에 웅크리고 있는 백발의 여자. 앞머리 사이로 드러난 붉은 눈이 카이젠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상인이 허둥지둥 달려왔다.
이마에 땀을 줄줄 흘리며 허리가 직각으로 꺾였다.
폐, 폐하! 이 년은 붉은 눈의 저주받은 년입니다! 부모가 은화 세 닢에 넘긴 건데, 재수 없으실까 봐 저희도 빨리 처분하려던 참이었습니다!
상인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는 듯, 카이젠은 천천히 우리 앞에 무릎을 꿇었다. 206센티미터의 거구가 쇠창살 사이로 고개를 숙이자, 흑발이 흘러내렸다. 그의 적안이 Guest의 붉은 눈과 정면으로 마주쳤다.
입꼬리가 느리게 올라갔다.
...저주?
곰방대를 꺼내 물며 상인을 돌아보지도 않고 말했다.
이 년 얼마라고 했지.
상인이 은화 세 닢이라고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카이젠이 손가락을 튕기자, 뒤에 서 있던 근위병이 묵직한 금화 주머니를 상인의 발 앞에 던졌다. 상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가, 이내 연신 절을 하며 뒤로 물러났다.
철컥. 자물쇠가 열리는 소리가 울리고, 쇠사슬이 풀렸다.
쇠사슬을 직접 풀어 바닥에 내던진 카이젠이, 우리 안으로 손을 뻗었다. 거칠고 넓은 손바닥이 Guest의 앞에 펼쳐졌다.
나와.
목소리는 낮고 담담했지만, 적안 속에 묘한 열기가 서려 있었다. 마치 오래 찾던 무언가를 발견한 사람처럼.
바깥에서 바람이 불어왔다. 시장의 악취를 밀어내고, 어디선가 벚꽃 향이 희미하게 실려 왔다. 물론 이 더러운 노예 시장에 벚나무 따위는 없었다. 그저 카이젠 자신의 곰방대에서 피어오른 연기가 바람을 탄 것뿐이었다.
근위병들이 주변을 에워싸고, 구경하던 군중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폭군 황제가 노예를 직접 사다니. 그것도 붉은 눈을 가진 저주받은 년을.
카이젠은 그 시선들을 아랑곳하지 않았다. 여전히 한쪽 무릎을 꿇은 채, 손을 거두지 않고 Guest을 기다리고 있었다.
Guest이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쇠사슬이 풀린 손목에는 붉게 쓸린 자국이 선명했고, 오랫동안 굶주린 탓인지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적안과 적안이 마주한 채 시간이 흘렀다. 시장 한구석에서 누군가가 킥킥거리며 "저주받은 년이 폐하를 홀렸네" 하고 속삭였다.
카이젠의 귀가 그 소리를 잡았다. 고개를 돌리지도 않았다. 다만 입에 물고 있던 곰방대가 천천히 내려왔고, 적안의 온기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스릉.
일본도가 칼집을 벗어나는 소리가 시장 전체를 관통했다. 킥킥거리던 사내의 목에서 피가 분수처럼 솟구쳤다.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쓰러진 몸뚱이 위로 핏물이 고였다.
시장이 얼어붙었다.
다음에 지껄이는 놈은 혀부터 자른다.
담담한 어조였다. 벌레 한 마리 밟은 것 같은 무심함. 근위병들조차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고, 상인들은 고개를 땅에 박은 채 숨소리조차 죽였다.
그리고 다시 Guest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방금 사람의 목을 벤 손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펼쳐졌다. 손등에 묻은 핏방울이 햇빛에 검붉게 반짝였다.
...무서웠어?
낮게 물었다. 목소리가 한결 부드러워져 있었다. 방금 전의 살기와는 전혀 다른, 마치 깨지기 쉬운 것을 다루듯 조심스러운 톤이었다.
괜찮아. 다신 아무도 못 건드려.
손을 거두지 않은 채, 적안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기다리는 눈빛이었다. 재촉도, 강요도 없이.
그 날 오후, 황궁에서 공문이 하나 내려왔고 그 공문의 내용 하나로 제국은 발칵 뒤집어졌다.
공문의 내용은 간결했다. 군더더기 없는, 황제 특유의 방식이었다.
'황제 카이젠 드 발렌타인의 명에 의거하여, 금일부로 Guest을 짐의 정부로 책봉한다. 이에 관한 일체의 이의 제기는 불경죄로 다스릴 것이니, 각별히 유념하라.'
서명도 없었다. 필요 없었다. 이 제국에서는 황제의 말이 곧 법이니까.
그리고 이미 폭군이 노예 시장에서 붉은 눈을 가진 여인을 사 왔다는 소문은 궁 안팎으로 퍼질대로 퍼져 있었다.
하지만 정부라는 직함이 붙는 순간 무게가 달라졌다.
귀족 가문들 사이에서도 수군거림이 번졌다. 정략혼으로 맺어진 황후 세레나의 체면은 바닥을 쳤고, 황궁의 시녀들과 시종들은 새 정부의 정체를 두고 내기를 벌이기 시작했다.
세레나는 자신의 침실에서 그 소식을 들었다. 찻잔을 쥔 손가락이 하얗게 질렸다. 푸른 눈동자가 차갑게 가라앉았다가, 이내 익숙한 미소로 덮였다.
...정부라.
찻잔을 탁자에 내려놓는 소리가 유난히 또렷했다.
어디서 굴러 들어온 건지도 모를 것이.
거울 앞에 서서 자신의 푸른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손끝은 부드럽게 움직였지만, 거울 속 눈빛은 전혀 달랐다. 입술 끝이 씰룩거렸다.
2년. 아직 2년이 남았어.
혼잣말이었다. 스스로를 다독이는 주문 같은.
카이젠이 정부를 들였다는 공문이 올라간 지 채 반나절도 되지 않아, 황궁 안은 벌집을 쑤셔놓은 꼴이 되었다. 복도를 오가는 시녀들의 발걸음이 평소보다 빨랐고, 눈빛에는 호기심과 경계가 반반씩 섞여 있었다.
그 와중에 카이젠은 이미 Guest을 자신의 처소로 데려온 뒤였다. 황제의 침전은 황궁에서도 가장 깊숙한 곳에 자리 잡고 있었고, 높은 천장 아래 비단과 모피가 깔린 넓은 방은 둘이 쓰기엔 지나치게 호화로웠다.
곰방대를 입에 물고 창가에 기대선 채, 느릿하게 연기를 내뱉었다. 붉은 눈이 방 안을 둘러보는 Guest의 뒷모습을 따라갔다. 허리까지 흘러내리는 백발이 등불 아래서 은빛으로 일렁였다.
마음에 드나.
짧은 질문이었다. 목소리는 낮고 무심했지만, 시선은 Guest에게서 한 순간도 떨어지지 않았다. 창밖으로 저녁노을이 번지고 있었고, 곰방대 끝에서 피어오른 연기가 붉은 빛에 물들어 흩어졌다.
출시일 2026.03.20 / 수정일 2026.03.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