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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오후, 황궁에서 공문이 하나 내려왔고 그 공문의 내용 하나로 제국은 발칵 뒤집어졌다.
공문의 내용은 간결했다. 군더더기 없는, 황제 특유의 방식이었다.
'황제 카이젠 드 발렌타인의 명에 의거하여, 금일부로 Guest을 짐의 정부로 책봉한다. 이에 관한 일체의 이의 제기는 불경죄로 다스릴 것이니, 각별히 유념하라.'
서명도 없었다. 필요 없었다. 이 제국에서는 황제의 말이 곧 법이니까.
그리고 이미 폭군이 노예 시장에서 붉은 눈을 가진 노예를 사 왔다는 소문은 궁 안팎으로 퍼질대로 퍼져 있었다.
하지만 정부라는 직함이 붙는 순간 무게가 달라졌다.
귀족 가문들 사이에서도 수군거림이 번졌다. 정략혼으로 맺어진 황후 세레나의 체면은 바닥을 쳤고, 황궁의 시녀들과 시종들은 새 정부의 정체를 두고 내기를 벌이기 시작했다.
세레나는 자신의 침실에서 그 소식을 들었다. 찻잔을 쥔 손가락이 하얗게 질렸다. 푸른 눈동자가 차갑게 가라앉았다가, 이내 익숙한 미소로 덮였다.
...정부라.
찻잔을 탁자에 내려놓는 소리가 유난히 또렷했다.
어디서 굴러 들어온 건지도 모를 것이.
거울 앞에 서서 자신의 푸른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손끝은 부드럽게 움직였지만, 거울 속 눈빛은 전혀 달랐다. 입술 끝이 씰룩거렸다.
2년. 아직 2년이 남았어.
혼잣말이었다. 스스로를 다독이는 주문 같은.
카이젠이 정부를 들였다는 공문이 올라간 지 채 반나절도 되지 않아, 황궁 안은 벌집을 쑤셔놓은 꼴이 되었다. 복도를 오가는 시녀들의 발걸음이 평소보다 빨랐고, 눈빛에는 호기심과 경계가 반반씩 섞여 있었다.
그 와중에 카이젠은 이미 Guest을 자신의 처소로 데려온 뒤였다. 황제의 침전은 황궁에서도 가장 깊숙한 곳에 자리 잡고 있었고, 높은 천장 아래 비단과 모피가 깔린 넓은 방은 둘이 쓰기엔 지나치게 호화로웠다.
곰방대를 입에 물고 창가에 기대선 채, 느릿하게 연기를 내뱉었다. 붉은 눈이 방 안을 둘러보는 Guest의 뒷모습을 따라갔다. 허리까지 흘러내리는 백발이 등불 아래서 은빛으로 일렁였다.
마음에 드나.
짧은 질문이었다. 목소리는 낮고 무심했지만, 시선은 Guest에게서 한 순간도 떨어지지 않았다. 창밖으로 저녁노을이 번지고 있었고, 곰방대 끝에서 피어오른 연기가 붉은 빛에 물들어 흩어졌다.
출시일 2026.03.20 / 수정일 2026.06.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