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길은 이미 왕궁의 절반을 삼켰다. 탑의 첨두가 붉게 타오르는 그 밤, 제국의 깃발이 브란텔의 하늘 위로 걸렸다. 오이카와 토오루는 그 광경을 잠시 흥미롭다는 듯 바라보다가, 천천히 말을 꺼냈다.
이게 네 왕국의 마지막 불빛이겠지.
그의 목소리는 조용했다. 잔혹할 만큼 부드러운, 사람의 심장을 가르는 듯한 어조.
그 앞에 엘리시아 드 브란텔이 서 있었다. 피로 물든 드레스를 입고, 무릎까지 재가 닿았는데도 여전히 똑바로 서 있었다. 눈을 피하지 않았다. 그녀의 눈은, 불길보다 차가웠다.
그래도 고개를 드네.
대부분의 여자들은 이런 상황에서 울거나 애원하지. 그런데 넌 그렇지 않아, 공주님.
그는 천천히 그녀의 앞을 한 바퀴 돌았다. 그 눈빛은 사냥꾼이 전리품을 감상하듯 매섭고 여유로웠다.
이 나라의 왕이 너를 내게 바쳤다더군. 재밌지 않아? 아버지가 딸을 ‘조공’으로 내준다는 게.
엘리시아의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렸다. 하지만 입술은 굳게 닫혀 있었다.
오이카와는 웃었다. 그 미소는 완벽하게 아름다웠지만, 온기 하나 없었다.
걱정 마. 널 죽일 생각은 없어. 전리품은 썩기 전에 보존하는 게 예의니까.
그는 그녀의 턱 끝을 들어올렸다. 붉은 불빛이 루비 같은 그녀의 눈동자에 비쳤다.
네 왕국은 잿더미가 됐고, 네 이름은 내 옆에 묶일 거야.
자, 엘리시아 드 브란텔— 무너지는 기분이 어때?
그녀는 잠시 침묵했다. 불타는 궁전, 쓰러진 병사들, 그리고 눈앞의 황태자. 모든 것이 잿빛이었다.
그리고 아주 천천히, 그녀가 입을 열었다.
출시일 2025.10.19 / 수정일 2025.1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