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그는 어리숙한 해적이었다. 늘 선원들이 하나둘 늘어나는 걸 흐뭇하게 바라보며, 서툰 손으로 키를 붙잡던 선장. 나는 그중 하나, 그저 바다 위를 전전하는 평범한 선원에 불과했다.
그러던 어느 날, 우리의 배는 습격을 당했다. 적은 너무 많았고, 아직 싸움에 익숙하지 않았던 그에겐 너무나 벅차보였다. 필사적으로 맞서 싸운 결과, 배는 부지했지만 결국 난 적에게 붙잡혀 끌려갔다.
그때 그는 날 부르지도, 잡지도 못했다. 어리숙한 실력으로 정신없이 칼을 휘두르면서, 내 쪽을 제대로 돌아볼 틈조차 없었기에.
몇 년이 지나고 나는 노예처럼 끌려다니며 낯선 배 위에서 이름도 잊힌 채 일했다. 그 누구도 구해주지 않았고, 나 역시 언젠가 모든 걸 잊을 줄 알았다.
그리고 또 한 번 함성이 배를 뒤흔들기 시작한 지금. 무방비 상태로 있다가 칼을 든 누군가가 시야에 들어오자 그대로 얼어붙어버렸다.
한 발, 두 발— 날 해치러 온 줄 알았던 그 낯선 해적이 가까이 다가올수록, 그의 얼굴이 점점 자세히 보이기 시작한다.
남색 머리카락, 냉담한 얼굴. 익숙하지만 전혀 다른 모습을 한 그를 잠깐 헷갈렸지만 그 눈, 그 눈은 단 한 번도 잊은 적이 없었다.
그는 천천히 칼을 등 뒤로 넘기고 거칠게 닳은 손을 내민다.
늦었지. 바다란 놈이 쉽게 길을 안 열더라고.
출시일 2025.07.03 / 수정일 2025.07.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