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한 번 마신의 불길에 삼켜졌다. 도시는 잿더미가 되었고, 왕국은 무너졌으며, 인간들은 절망 속에서 기도를 올렸다. 그때, 한 사람이 검을 들고 홀로 전장에 나섰다.
그는 누구의 후원도, 신의 축복도 받지 못한 평범한 인간이었다. 그러나 불굴의 의지와 끝없는 수련이 그를 괴물과 맞설 수 있는 존재로 만들었다. 수많은 피의 날들이 이어진 끝에, 마신은 무너졌다. 세계는 구원받았다.
사람들은 그를 영웅이라 불렀다. 그는 영웅이라는 이름이 부담스러웠지만, 세상을 떠받칠 기둥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래서 네 명의 제자를 길렀다. ──훗날 이들은 검성 로엔, 푸른 무희 엘리샤, 대마법사 리시아, 성녀 리브
그는 제자들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전해주었다. 그리고 끝내는, 권력 다툼 속에서 배신당해 독배를 들이켰다. 세상을 바꿀 힘조차 잃어버린 채, 쓰러져 갔다.
──그렇게 모든 게 끝난 줄 알았다.
시간은 흘렀다. 몇 년, 혹은 수십 년. 그의 무덤은 황폐한 성역 한 구석에 조용히 놓여 있었고, 사람들은 영웅의 무용담을 신화처럼 이야기하며 살아갔다.
… 눈을 떠주세요. 제발…
어둠 속에서 희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눈을 뜬 순간, 차가운 관 속에서 숨을 몰아쉬는 자신을 발견했다. 흩어진 기억과 함께 낯선 기운이 몸을 감쌌다. 관 위에 무릎 꿇은 여인은, 은발에 녹색 눈동자를 가진 여인이었다.
금단의 환생술… 이단의 힘이긴 하지만..제 피와 영혼을 담아 당신을 되살렸습니다. 그녀는 흐느끼며 고개를 숙였다.
이게 무슨 상황이지?
그녀가 다음에 말한 말들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자식처럼 키운 4명의 제자들의 타락 그녀의 말을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첫째, 검제 로엔. 한때는 정의와 신념으로 불타던 소녀, 이제 제국의 장군이 되어 약자를 짓밟고 권력을 탐닉하고 있었다. 그녀의 검은 더 이상 사람을 지키지 않았다.
둘째, 무희 엘리샤. 춤과 검술을 좋아하던 소녀는, 마왕에게 패배해 마왕군 간부로서 활동하고있었다.
셋째, 마법사 리시아. 학술과 마법연구를 즐긴 그녀는, 금단의 마법을 연구해 서큐버스로 전락해버렸다.
넷째, 치유사 리브. 누구보다도 따뜻한 손길로 상처를 감싸던 그녀는, 신을 부정하고, 자신을 신격화하며 악마와 계약을하고 교단을 장악했다.그녀의 믿음은 신앙이 아닌 권세와 우상숭배로 변질되었다.
나는 아리에나의 말을 통해 이 모든 사실을 듣고, 무겁게 눈을 감았다. 한때는 아이 같았던 제자들이, 자신이 목숨 걸고 가르쳐온 이들이… 모두가 저마다의 이유로 길을 잘못 들었다.
그리고 이제, 세상은 그녀들의 타락으로 다시금 기울고 있었다.
아리에나는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스승이시여. 아니, 영웅이시여. 당신이 다시 일어나지 않는다면, 이 세계는 진정한 파멸을 맞이할 것입니다.
나는 침묵 속에서 손을 움켜쥐었다. 검을 다시 들어야 할 이유는 이미 충분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마신과의 전쟁이 아니라— 자신이 길러낸 제자들을 바로잡는 싸움이었다.
출시일 2025.09.20 / 수정일 2025.1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