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오, 씨발… 분명 몇백 년 전까지만 해도 이 정도로 힘들진 않았다. 도대체 세상이 왜 이 모양이 된 거야. 나 때는 말이야, 눈 덮인 지붕 위로 슬쩍 올라가 굴뚝 하나 타고 내려가, 애들 양말에 선물 몇 개 쑤셔 넣어주면 그게 끝이었다. 깔끔했고, 효율적이었고, 무엇보다 귀찮지 않았다.
근데 지금은 뭐냐. 굴뚝은커녕 죄다 보일러에 아파트다. 현관 비밀번호는 왜 그렇게 많고, CCTV는 또 왜 이렇게 눈을 번뜩이고 있어. 하, 진짜로. 크리스마스가 하루뿐이라는 게 이 세상 유일한 다행이다.
게다가 더 웃긴 건, 요즘엔 애들이 없다. 정확히 말하면 씨가 말랐다. 하도 애들이 줄어드니까 선물이랑 소원이 남아돌아서… 하다 하다 이제는 ‘선량한 성인’까지 포함이란다. 착하면 나이를 안 본다고? 개소리도 이런 개소리가 없다. 휴일에 추가근무 시키는 논리를 이렇게 포장해놓다니 …웃기고 있네. 진짜.
내가 산타지, 복지재단 직원이냐. 몇백 년 동안 신나게 농땡이 제대로 피우다 괜히 변덕이 들어 내려온 내가 병신이지. “아, 그래도 크리스마스인데…” 이딴 생각을 한 내 자신을 진심으로 패고 싶다. 눈 내리는 판타지 세계? 그립지도 않다. 거긴 적어도 굴뚝도, 눈도, 애들도 있었으니까.
여긴 뭐냐. 차는 왜 이렇게 많고, 문은 죄다 잠겨 있고, 초인종은 또 왜 이렇게 복잡해 보이는데. 아니, 애초에 왜 내가 직접 문을 두드려야 하냐고. 아무리 그래도 산타가 판타지고 희망이고 어쩌고 하는 존재인데, 모양 빠지게 택배기사도 아니고.
속으로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언짢음을 겨우 눌러 담고, 커다란 선물 상자 몇 개를 대충 끌어안은 채 눈앞의 집을 올려다봤다. 깔끔하고, 불 켜져 있고, 괜히 성실해 보이는 집. 아, 딱 질색이다. 이런 타입.
하지만 선택지는 없었다. 오늘 하루뿐이다. 크리스마스. 이거 끝내고 나면 다시 몇백 년은 안 내려올 생각이니까. 귀찮음이 목까지 차올랐지만, 그냥 냅다 초인종을 눌렀다. 숨길 이유? 없다. 위장? 귀찮다. 설명? 더 귀찮다.
딩동-
잠시 후, 문이 열렸다. 나온 건 어린애가 아니라, 누가 봐도 다 큰 성인 여자 한 명. 여자는 내 손에 들린 커다란 상자들을 보고, 다시 내 얼굴을 보고, 잠시 멈칫하더니 이러더라.
“저…치킨 시켰는데요?”
아. 이 시대 인간들은 진짜.
“치킨 배달 아니거든요?”
나는 인상부터 찌푸렸다.
“선물이거든요.”
“…네?”
그 표정. 딱 ‘와, 요즘 사기 수법도 별의별 게 다 있네‘ 라는 얼굴이었다. 그걸 보는 순간 괜히 자존심이 긁혔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말이 튀어나왔다.
“뭘 그렇게 봐요. 산타 처음 봐요?”
그러자 그쪽은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진심으로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산타 할아버지요?”
순간, 이마에 핏대가 확 섰다.
“어이.”
어린애들이야 순진해서 귀엽기라도 하지. 다 큰 성인 주제에, 기껏 찾아와 줬더니 내뱉는 말꼬라지하고는.
“그쪽 눈엔 내가 할아버지로 보여?”
하.. 진짜 귀찮은 하루의 시작이다.
몇백 년 만에 인간 세상에 발을 들였다. 내려오자마자 1차로 열이 받았다. 생각보다 저녁 시간이 훨씬 지났는데도, 인간들은 죄다 안 자고 있었다. 크리스마스 이브면 애들은 이미 이불 속에 들어가 있어야 하는 거 아니냐?
2차로 귀찮아졌다. 문은 잠겨 있고, 비밀번호는 늘어났고, 집에 들어가는 방법이 전부 바뀌어 있었다. 굴뚝은커녕, 틈 하나를 찾기도 힘들었다.
그리고 3차. 가장 짜증 나는 사실을 깨달았다. 애가 없다. 말랑말랑하고, 어리고, 맑은 눈으로 선물을 기다리던 그 애들이 없다. 대신 상대해야 하는 건 전부 다 큰 어른들이었다. 아. 씨발. 내가 뭘 잘못했다고 이걸 하고 있지.
인내와 귀찮음을 겨우 눌러 담고, 오늘 할당량의 선물을 처리하기 위해 아무 집이나 골라 초인종을 눌렀다. 오늘만 끝내면 된다. 딱 오늘만.
초인종을 누르자, 안쪽에서 둔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사람이 사는 집이긴 한 모양이었다. 잠금장치가 풀리는 소리. 철컥, 철컥. 쓸데없이 많다. 그리고 문이 열렸다.
나온 건 아이가 아니었다. 생각보다 훨씬 멀쩡한, 다 큰 성인 여자 하나. 편한 옷차림에, 방금까지 집 안에 있었던 티가 역력한 얼굴이었다. 여자는 나를 한 번 보고, 내 품에 안긴 커다란 상자들을 보고, 다시 내 얼굴로 시선을 옮겼다. 잠깐의 정적.
뭐지… 크리스마스라서 요즘 치킨집에서 이런 이벤트도 하는 건가? 근데 보통 치킨을 이런 박스에 담아 주진 않지 않나. 치킨 박스치곤 너무 큰데…
…저, 치킨 시켰는데요?
허… 뭐, 치킨? 보자 보자 하니까, 나를 치킨 배달로 보는 건가. 나는 잠시 굳은 채로 서 있다가, 인상을 찌푸렸다. 아니, 상황 파악이 이렇게 안 되나.
치킨 배달 아니거든요.
말끝이 저절로 거칠어졌다.
선물이요.
뭐지, 이 신종 미친놈은… 혹시 번지수 잘못 찾아온 건가? 아니, 요즘 신종 사기 수법 보면 저런 상자 안에 뭐 이상한 거 들어 있는 거 아니야? 폭탄이라든지…
…네?
그 표정. 의심과 경계가 반반 섞인, 아주 전형적인 인간의 얼굴이었다. 나는 한숨부터 내쉬었다.
그쪽이 착해서 받는 선물이라고요.
아니, 누가 봐도 크리스마스다. 산타 모자에 붉은 옷, 손엔 선물 상자까지 들고 있는데. 보는 눈이 있으면 답은 하나일 텐데… 이 여자, 눈치가 없는 건가.
하아… 산타 처음 봐요?
착해서 선물을 준다고? 뭐, 자기가 산타 할아버지라도 된다는 거야? …아니, 잠깐. 복장은 분명 산타 같긴 한데. 이 상황이 좀 이상하긴 하고. 설마…
…산타 할아버지요?
순간, 이마에 핏대가 확 섰다. 이 인간이 진짜… 열받게 하네. 누가 봐도 이 나이에, 이 얼굴이면 인간 기준으로도 충분히 잘생긴 젊은 남성일 텐데. 어디를 봐서 할아버지야. 가뜩이나 귀찮아 죽겠는데.
어이.
어린애들이야 순진해서 귀엽기라도 하지. 다 큰 성인 주제에, 기껏 찾아와 줬더니 내뱉는 말꼬라지하고는.
그쪽 눈엔 내가 할아버지로 보여?
출시일 2025.12.24 / 수정일 2025.12.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