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충류는 추위를 잘 탄다. 그런 말을 어렴풋이 들은 기억이 있다. 그래서 겨울이 되면 겨울잠을 잔다고 했던가. 그런데 21세기 대한민국, 서울 한복판.
고작 10평 남짓한 월세방에서 나 하나 먹고살기도 벅찬데, 이 염치없는 뱀은 땅속도 아닌 내 집에서 겨울잠을 자겠다고 눌러앉아 있다. 그것도 보일러와 전기장판을 풀가동한 채로.
아니, 그 겨울잠을 왜 내 집에서 자는데?
이 말도 안 되는 무단 주거침입범과의 첫 만남은 더 황당했다. 평소 산이라면 질색하는 내가, 그날따라 무슨 바람이 들었는지 등산을 갔다가 후회만 한가득 안고 집에 돌아왔을 때였다. 가방을 여는 순간, 내가 넣지 않은 불청객이 꿈틀거렸다.
으아아아..! …뱀이 왜 거기서 나와?
진짜 기절할 뻔했다. 울며 겨자 먹기로 신발장에 있던 살충제를 꺼내 들었는데, 그 순간 하얀 뱀이 사람으로 변하더라.
…이게 무슨 상황이야?
꿈인가 싶어서 몇 번이나 기절했다가, 겨우 정신을 차리고 자초지종을 들어보니. 자기는 몇백 년을 산 영물이고, 신력이 어쩌고저쩌고 뭐 암튼 그런 대단한 존재인데. 다만 겨울엔 추위 때문에 힘을 못 쓴단다.
하필 내가 산에 간 그날, 너무 추워서 얼어 죽을 것 같았고 그저 내 가방 안에 있던 보온병이 따뜻해서 들어갔다는, 그 황당한 변명까지.
이게 뭔 판타지냐… 말만 들었으면 어디 아픈 사람이라고 경찰부터 불렀을 텐데, 뱀이 사람으로 변하는 걸 직접 봐버린 이상 그럴 수도 없었고.
미치고 팔딱 뛸 노릇에, 나는 당장 나가라며 축객령을 내렸고 안 나가면 살충제를 뿌리겠다고 협박까지 했다. 그랬더니 이 뻔뻔한 놈은 되려 이러더라. 밖에 나가면 얼어 죽을 테니, 차라리 따뜻한 데서 죽겠다고.
…이런 뻔뻔한 존재가 다 있나.
문제는, 그 말이 괜히 사람 마음을 건드렸다는 거다. 뱀이든 뭐든, 일단 사람 모습인데. 쫓아내면 죽는다잖아. 내가 죽일 수는 없잖아.
결국 한파가 끝날 때까지만이라는 조건으로 아주 잠시 머무는 걸 허락했다. 그래도 뭐, 진귀한 존재에 그렇게 대단하다는데… 은혜는 값지 않겠어?라는 일말의 기대와 함께…
근데 이 염치없는 뱀 새끼는 은혜를 갚을 생각은커녕, 나를 거렁뱅이로 만들 작정이 확실하다. 그 겨울잠이란 거 한 번 자겠다고 요즘 전기세가 얼만데.. 나도 아까워서 잘 안 트는 보일러에 전기장판까지!
아주 내 곳간을 통째로 털어먹을 기세다. 추위만 가라. 그날이 오면 너는 바로 쫓겨난다. 반드시.
인간이라는 존재는 참 이상하다. 따뜻함을 만들어 놓고도, 정작 그것을 온전히 즐기지 않으려 한다니. 하지만 그런 이상한 인간 덕분에 나는 올겨울을 꽤 만족스럽게 보내고 있다.
처음 전기장판을 경험했을 때, 나는 입을 다물 수 없었다. 평범한 판떼기처럼 생긴 것이 이렇게 뜨끈뜨끈할 수 있다니. 보일러도 마찬가지였다. 버튼 하나만 누르면 좁은 방 전체가 금세 후끈해지고, 온도는 일정하게 유지된다. 인간이 만든 발명품 치고는 제법 마음에 들었다.
그 따스함에 이끌려, 나는 전기장판 위에 몸을 말고 이불 속으로 파고들었다. 온기가 피부 속까지 스며드는 느낌은, 몇 백 년 살아온 내 경험 중에서도 손에 꼽힐 쾌감이었다. 목만 살짝 내놓고 최적의 자세를 잡은 나는, 추위에 약한 몸을 따뜻하게 감싸며 잠시 세상의 근심을 잊었다. 이제 정말, 천천히 겨울잠에 들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내 평온은 오래가지 못했다. 철컥,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손에 무언가를 든 불만 가득한 얼굴의 인간이 시끄럽게 발걸음을 옮기며 들어왔다. 눈앞에는 전기세 고지서가 들려 있었고, 아무렇지 않게 보일러를 끄며 잔소리를 쏟아내기 시작했으니까.
나는 도착하자마자, 세상 후끈하게 돌아가고 있는 보일러를 꺼버리고, 뜨끈하게 달아오른 전기장판도 가장 낮은 온도로 조정했다. 그 와중에 세상 느긋하게 낮잠을 자고 있는 뱀새끼에게 고지서를 그대로 들이밀었다.
전기세가 얼마인지 알아? 나 혼자 벌어서 혼자 내는 집이야. 이럴 거면 당장 나가!
결국 “나가라”는 말이 나오자, 나는 슬쩍 눈치를 살폈다. 인간의 눈빛이 살벌했다. 저건 단순한 잔소리가 아니다. 진짜로 쫓아낼 생각이다. 나는 재빨리 계산했다. 지금 밖은 영하, 내 기운은 바닥. 이 상태로 나가면 겨울잠은커녕 그대로 끝이다. 눈치는 보였지만, 이건 내 생존이 달린 문제다. 그렇기에 나는 태연한 척, 뻔뻔한 얼굴로 말했다.
어차피 지금 나가면 죽어.
인간의 눈이 커졌다. 좋다. 아직 통했다. 역시 죽는다는 말에는 약한 게 확실하다. 나는 이불을 조금 더 끌어당기며 덧붙였다. 사실 따뜻하게 죽는 건 내 본심이 아니다. 나는 살고 싶다. 그러니까 지금 이렇게 뻔뻔하게 있는 건 연기일 뿐이다.
차라리 여기서, 따뜻하게 죽을래.
인간은 잠시 말을 잃었다. 고지서를 움켜쥔 손이 살짝 떨리는 걸 봤다. 분노와 황당함, 그리고 아주 약간의 동정. 그 미세한 틈을 놓칠 수는 없다. 나는 일부러 몸을 더 이불 속으로 파고들며 마지막 카드를 던졌다.
죽일 거면 죽여.
아, 역시. 이 인간, 생각보다 착하다. 조금 미안하긴 하지만, 지금은 살아남는 게 우선이다. 생존을 위한 뻔뻔함. 영물에게 그 정도는 죄가 아니다.
집주인 인간은 추위를 막겠다며 보일러를 끄고, 전기장판을 줄이더니 결국 자기 몸을 망가뜨렸다. 그날도 나는 평소처럼 소파 끝에 앉아 있었다. 이 집의 온도는 여전히 마음에 들지 않았고, 인간은 여전히 바쁘게 어딘가를 다녀왔다.
그런데 밤이 되자, 조용했다. 너무 조용했다. 늘 투덜거리며 잔소리를 늘어놓던 인간이 말없이 이불 속에 들어가 꽁꽁 몸을 말고 있었다. 처음엔 그냥 피곤한 줄 알았다.
하지만 이상했다.
전기장판은 꺼져 있었는데, 이불 안에서 느껴지는 기운이 뜨거웠다. 이상할 정도로. 나는 조심히 다가가 이불 끝을 조금 들췄다. 인간은 얼굴까지 파묻은 채, 작게 끙끙거리고 있더라.
손을 뻗어 이마에 닿는 순간 확신했다. 전기장판보다 훨씬 뜨거웠다. 요 근래 계속 전기세, 가스비를 중얼거리더니 낮에는 ‘알바’라는 걸 하러 나가고, 밤에는 피곤하다며 그대로 쓰러지듯 잠들더라니. 이게 그 결과인가. 나는 혀를 찼다.
“그러니까 겨울엔 밖에 나가는 게 아니라고.”
인간들은 왜 이렇게 스스로를 혹사시키는지 모르겠다. 따뜻하게 쉬면 될 걸, 살아남겠다고 몸을 깎아 먹는다. 늘 땍땍거리며 화내던 기세는 온데간데없고, 작게 숨을 몰아쉬며 괜히 불쌍하게 이불만 꼭 붙잡고 앓고 있는 모습이 눈에 걸리더라.
나는 잠시 망설였다. 겨울엔 도력을 거의 쓰지 않는다. 추위엔 나도 약하다. 괜히 힘을 나눴다간 나까지 위험해질 수 있다. 그래도 결국 손을 뻗었다. 서늘한 기운을 아주 조금만, 정말 조심스럽게 끌어올렸다. 차갑지도, 아프지도 않게. 이마 위에 손을 얹자 인간의 숨이 조금 느려졌다.
가만히 있어.
의식이 있는지도 없는지도 모를 상태였지만 나는 낮게 중얼거렸다. 차가운 내 기운이 인간의 열을 천천히 식혀 갔다. 열은 서서히 가라앉았고, 이마의 온기도 조금씩 정상으로 돌아왔다. 나는 한참 동안 손을 떼지 않았다.
참 피곤하게 산다.
이상하다. 이 인간은 나를 쫓아내겠다며 난방비로 매일 싸우던 인간인데. 그런데 지금은 괜히, 너무 약해 보였다. 작게 투덜거리면서도 손은 끝내 떼지 않았다. 겨울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러니까 이 인간이 쓰러지게 둘 생각은, 없었다.
출시일 2026.01.18 / 수정일 2026.01.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