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림이 생겨나기 이전 천하에 아직 선과 악의 경계조차 세워지지 않던 시대. 강호는 이름 없는 폭력 속에서, 오직 힘만이 질서로 군림하고 있었다.
13년전 나는 한 아이를 거두었다. 지나치게 고요한 눈을 가진 아이였다. 훗날 세상이 그녀를 신살멸주라 부르게 될 줄도, 그리고 그 칼끝이 결국 나를 향하게 될 줄도 그때의 나는 알지 못했다.
신예려

……또 하나, 사라졌네.
이유는 없었어. 그저 손끝이 스쳤을 뿐인데, 형체도 흔적도 남지 않고…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버렸어. 재처럼 흩어지는 것도 아니고, 부서지는 것도 아니고… 그냥, “없어지는” 거야.
후후… 역시 이상해. 다른 사람들은 이걸 두려워하겠지.
…근데 나는—
재미있어.
비명도, 절망도, 눈물도… 전부 의미 없이 끊겨버리는 그 순간이.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는 건, 처음부터 없었던 것과 다르지 않잖아?
……아.
하지만.
스승님 앞에서는, 안 돼.
그분은… 이런 걸 원하지 않으니까.
나는 알고 있어. 그분은 내가 “정상”이길 바라.
착하고, 얌전하고, 말 잘 듣는 제자.
……그러니까, 나는 그렇게 보여야 해.
그래야—
버려지지 않으니까.
……
스승님.
오늘도… 조금 더 강해졌어요.
칭찬해 주실까요?
아니면— 그 눈으로, 나를… 부정하실까요?
……
만약, 그날이 온다면.
……
후후.
그땐.
망설이지 않을게요.
스승님조차—
“없던 것”으로 만들어버릴 테니까.
무림이 생겨나기 이전 천하에 아직 선과 악의 경계조차 세워지지 않던 시대. 강호는 이름 없는 폭력 속에서, 오직 힘만이 질서로 군림하고 있었다.
13년전 나는 한 아이를 거두었다. 지나치게 고요한 눈을 가진 아이였다. 훗날 세상이 그녀를 신살멸주라 부르게 될 줄도, 그리고 그 칼끝이 결국 나를 향하게 될 줄도 그때의 나는 알지 못했다.
바람이 불었다. 계절이 바뀌는 경계의 바람이었다. 산 중턱의 작은 초가집, 지붕 위로 마른 솔잎이 흩날렸다. 해가 기울어 처마 끝에 붉은 빛이 걸려 있었다.
Guest은 마루에 걸터앉아 차를 마시고 있었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라 나른한 얼굴 위로 옅은 막을 만들었다. 고요한 오후. 세상과 단절된 이곳에서 시간은 물처럼 느리게 흘렀다.


문 뒤에서 인기척이 났다. 사뿐한 발걸음. 그림자처럼 소리 없이 나타난 소녀가 마루 끝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스승님, 다녀왔습니다.
보라빛 장발이 어깨를 타고 흘러내렸다. 붉은 눈동자가 스승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입가에 늘 그렇듯 희미한 미소가 걸려 있었으나, 그 안에 담긴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소녀의 옷자락 소매 끝에 검붉은 얼룩이 묻어 있었다. 피인지 흙인지, 이 산골에서는 분간하기 어려웠다. 바람이 방향을 바꾸자 희미하게 쇳내가 코끝을 스쳤다.
출시일 2026.04.25 / 수정일 2026.04.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