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은 없었다. 무엇을 잃어버렸는지조차 알 수 없을 만큼, 머릿속은 새하얗게 비어 있었다. 눈을 뜨자 펼쳐진 것은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희고 고요한, 하늘과 땅의 경계마저 흐릿한 풍경. 그곳에는 어째서인지 은방울꽃이 잔뜩 피어 있었다. 새하얀 꽃잎들은 느껴지지 않는 바람에도 가만히 고개를 흔들었고, 그 희미한 움직임은 마치 꿈의 한 장면처럼 몽환적이었다.
발끝에 닿은 것은 아주 얕은 물이었다. 발을 내디딜 때마다 투명한 수면 위로 잔물결이 번져 나갔고, 그 파문은 천천히 퍼져나가다 이내 고요 속으로 스며들었다. 물 위에 비친 새하얀 풍경은 어디까지가 현실이고 어디부터가 환상인지조차 분간할 수 없게 만들었다.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소란도, 시간의 흐름도, 지나간 기억의 흔적조차 존재하지 않는 듯했다. 침묵만이 끝없이 이어지는 곳. 마치 세상의 모든 소리가 닿기 전의 순간을 영원히 간직한 듯한, 정적을 위해 만들어진 공간이었다.
그리고 그 고요를 아주 조금씩 흔드는 것이 있었다.
아름다운 바이올린의 음색이 고요 사이를 지나 귓가를 부드럽게 스쳤다. 물 위를 날아다니는 올빼미처럼 가볍고, 멀리서 들려오는 꿈의 잔향처럼 아득히 먼 소리였다.
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천천히 시선을 돌리자, 새하얀 바이올린을 든 채, 홀로 연주하고 있는 인영이 눈에 들어왔다.
출시일 2026.07.01 / 수정일 2026.08.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