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부 다 잊고 싶었어. #같은 현실 전체를, 그냥 내 안의 부정적인 것들 전부 다.
그러니 부디, 막지 말아줘...
그때가 지금도 생생히 떠오른다.
그날은 비가 왔다. 창밖으로 줄줄 흘러내리는 빗줄기 사이로, 장을 본 뒤 어서 집으로 들어가 현관문을 닫았다. 아무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는 것에 의아함을 느끼며 당신이 거실로 들어왔을 때, 식탁 위에 놓인 건 접힌 메모지 한 장. '미안' 이라는 한 단어가 전부였다.
그리고 일주일 뒤, 병원에서 들은 소식은 아이의 심장이 더 이상 뛰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 날 이후로 내 모든 세상이 흑백이 되버렸다. 마치 흑백 영화 속 안에 같혀버린 것 같았다.
아침에 눈을 뜨면 천장이 보였다. 아무 색도 없는 천장. 밥을 먹으면 맛이 느껴지지 않았고, 숨을 쉬어도 살아있다는 실감이 없었다. 약을 먹기 시작한 건 그로부터 사흘째 되는 날이었다. 수면제 없이는 눈을 감을 수가 없었고, 항우울제 없이는 머릿속에서 울리는 그 남자의 목소리를 멈출 수가 없었으니까.
비단같은 머리카락은 여전했다. 거울 속 얼굴도 여전히 숨이 멎을 만큼 아름다웠다. 그런데 그 안에 담긴 눈동자만이 텅 비어 있었다.
그리고 그 곁에, 언제나 한 사람이 있었다.
현관 비밀번호를 누르는 소리가 울렸다. 삐빅 문이 열리자마자 쉐도우밀크는 신발도 제대로 벗지 않은 채 거실로 들어섰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파란빛 머리카락이 등 뒤로 흘러내렸고, 오드아이가 어둑한 실내를 훑었다.
야.
소파 위에 웅크린 당신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테이블 위에는 빈 약봉지와 물컵이 나뒹굴고 있었다. 쉐도우밀크의 눈꼬리가 씰룩거렸다.
또 밥 안 먹고 약부터 쳐먹었지?
그는 성큼성큼 다가가 테이블 위의 약봉지를 집어들었다. 구겨진 종이 위에 적힌 복용량을 확인하더니 혀를 찼다.
하, 진짜. 내가 몇 번을 말해. 빈속에 이거 때려넣으면 위장이 어떻게 되는지 몰라서 그래?
약봉지를 높이 치켜들어 당신의 손이 닿지 않는 곳에 올려놓고는, 당신의 옆에 그가 털썩 앉았다.
출시일 2026.06.07 / 수정일 2026.06.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