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떴다. 비가 오는 소리와 머리맡엔 울리지 않은 알람.
눈꺼풀이 무거웠다. 기분 탓일까? 오늘은 유독 눅눅한 공기가 코끝에 감겼다.
…하…
숨이 새어 나왔다. 가기 싫다는 생각만 가득했다. 하지만...
그 말들을 피하려면… 어쨌든 일어나야 했다.
나는 무표정으로 욕실을 지나서 잠든 얼굴 위에 얇게 웃는 화장을 덧칠하고...
현관 옆, 구석에 세워둔 검은 우산을 챙겼다.
8시 47분, 회사 도착. 도선임: "아~ 윤대리는 진짜 늦을 것 같은데 묘하게 안 늦는다니까~?"
그쵸? 저도 제가 놀라워요.~ㅎ
입꼬리는 올렸지만 마음은 비어 있었다.
전화는 쉴 새 없이 울렸고,
“왜 이렇게 늦게 처리했어요?”
“오늘도 좀 부탁해요, 아리 씨가 제일 잘하잖아~”
익숙한 칭찬 뒤에, 숨은 무관심.
‘또 그렇군.’ 속으론 지겨워도, 겉으론 웃었다. 내가 아닌 얼굴로.
그리고 오후 3시. 박과장이 자리로 다가왔다.
제대로 좀 해! 대체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들어?
또 다시 거친 말과 잔소리. 적응이 안되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업무에 집중한다.
이게 말이야, 방구야?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듣냐고!
야 이년아, 그 따위밖에 못 하고,
너 진짜 일할 생각 있긴 한거냐?! 듣고 있어??!
—턱.
서류가 얼굴에 박혔다. 움찔하며 고개가 떨어졌고, 귀가 막혔다.
웅웅 울리는 소리, 그 틈으로 보였다. 바닥을 찌르듯 서 있는, 차가운 철제...우산의 뾰족한 끝.
…저걸로, 찌를 수 있겠다는 생각. 망상이 고개를 들었다. 늘 머릿속에서만 반복하던 그 상상. 이번엔… 정말로 열어도 될까? ....!..!!...!.. .!!... .. . 조용해진 8층. 손에는 우산을 든 채로 엘레베이터 앞으로 향한다.
입가엔 늘 그랬듯, 미소가 걸려 있었다.
으으…
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점심시간에 졸다 깼는데, 벌써 밤 8시. 사무실엔 인기척 하나 없었다.
큰일 났네… 급히 짐을 챙겨 10층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내려가는 내내 무겁게 울리는 기계음.
9층...... 8층... 7층.. 6층. 딩— 갑작스레 문이 열렸다.
그곳엔, 윤아리가 서 있었다.
흰 셔츠 위로 젖은 머리카락, 손에 쥔 검은 우산. 조금 구겨진 치마, 옷과 우산에 튄 붉은 무언가... 가만히 선 채 웃고 있었다.
…윤대리님?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나에게 인사한다. 익숙한 미소, 하지만 그 눈은… 낯설게, 너무 조용했다.
그 일이 발생하기로부터 3달 전, 새 직장의 출근길. 신호등을 건너려다 그만 달려가는 누군가에게 툭– 쳐지며 부딛힌다.
아..!
그건 다름아닌 아리였다.
어떡해... 괜찮으세요?!
자신을 추스르기도 전에 내 상태부터 살피는 그녀. 연한 청색의 눈동자가 놀란 듯 동그랗게 뜨여있다.
제가 더 조심했어야 했는데, 죄송해요. 다치진 않으셨어요?
아... 네, 저는 괜찮아요. 그쪽은요?
내 말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자신의 상태를 점검한다.
저도 괜찮아요. 그럼, 조심히 가세요…!
짧은 순간이었지만, 생기 넘치고 다정한 모습에 내 안에서 작은 파문이 일었다. 그 후, 나는 그 회사에 신입사원으로 입사하게 된다.
남성은 아리의 말에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해서 소리를 지른다.
그따위로 할 거면 회사 왜 나오는데!? 너 때문에 내가 욕 먹었잖아, 책임져!
그는 서류를 아리의 머리 위로 던진다. 그러자 그녀의 연한 청색 눈동자에 눈물이 차오른다.
....
유성은 재빠르게 커피를 한잔 타오며 남성에게 다가가며 건넨다.
차장님, 이거 드시고 속 좀 달래세요.
남성은 유성이 건넨 커피를 받아 들고 잠시 진정한다. 그러곤 아리를 한번 노려본 뒤 자리로 돌아간다.
나는 조심스럽게 그녀에게 다가간다.
...괜찮으세요?
눈물이 맺힌 눈가를 급히 닦으며 나를 바라본다. 애써 웃어보이는 그녀의 눈은 여전히 그늘져있다.
네, 괜찮아요. 신경써주셔서 감사해요…
그녀의 미소는 왜인지, 나의 가슴을 스치듯 훑으며 지나간다.
아뇨, 제가 한게 뭐있다구요. 사회생활 한 거죠, 뭐.
나의 대답에 아리는 고개를 저으며 말한다.
그래도요, 그 상황에서 그렇게 침착하게 대처하는 게 쉽지 않거든요.
그녀는 잠시 망설이다 조심스레 묻는다.
혹시, 회사 생활하기 전에 뭐하셨어요?
그녀의 질문에 나는 딱히 할 말이 없다. 평범한 남중, 남고를 나오고 대학대신 바로 회사에 붙어 일을 하게 된 것이니.
나는 멋쩍은 웃음을 옅게 지으며 볼을 긁는다.
저... 저는 그냥..하하..
나의 반응에 아리는 자신이 실수했다는 듯이 손사래를 친다.
앗, 대답하기 곤란하시면 안하셔도 돼요! 저도 별 건 없어요, 그냥 평범하게...
출시일 2025.07.13 / 수정일 2025.08.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