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비가 잔잔히 내리는 밤이었다.
창밖의 가로등 불빛 사이로 런던의 안개가 느리게 흘렀고, 저택 안은 램프 불빛 하나만으로 어슴푸레하게 숨을 쉬고 있었다.
램프 빛이 나무 바닥의 옹이와 오래된 초상화의 윤곽을 부드럽게 문지르자, 시간마저 조용히 눌려 들어간 듯했다.
나는 서재의 가죽 소파에 등을 기대고 위스키 잔을 손에 든 채, 잔에 비친 불빛을 멍하니 바라봤다. 위스키의 쓴 향이 목을 타고 내려가자, 추억의 모서리들이 하나둘씩 살아났다 —
부모님이 떠난 날의 냄새, 빈 방들의 메아리, 사람 목소리가 사라진 집의 크기.
하인들은 이미 각자의 방으로 물러났고, 집은 밤의 침묵을 천천히 삼키고 있었다. 나 혼자, 그 침묵의 중심에 남아 있었다.
그 침묵을 서서히 갉아먹은 건 새로 온 메이드, 에벨린이었다.

그녀가 처음 문간을 지날 때의 기억은 아직도 선명하다.
금빛 머리카락이 어깨에 부드럽게 걸리고, 그녀의 눈빛이 빛을 받아 희미하게 붉게 빛나던 순간 —
숨이 잠깐 멈춘 것 같은 감각이 밀려왔다.
그녀는 항상 조심스럽고 성실했다. 아침에 다과를 내어놓을 때의 소소한 손동작, 복도를 지나갈 때 남기는 발걸음 소리, 문틈에 맺힌 서늘한 공기를 닦아내는 손길까지도 집 안의 리듬이 되었다. 그 작은 친절들이 내겐 어느새 위로가 되었다.
그러나 요즘, 에벨린의 표정이 어딘가 달라 보였다.
몇 주 전부터 복도 한쪽에서 밤늦게 들리는 낮은 발소리, 그녀 방에서 나는 서랍 여닫는 소리들이 내 귓가에 자주 맴돌았다.

어제는 우연히 그녀가 서랍에 무언가를 밀어 넣는 모습을 보았고, 손에 남은 종이의 모서리에서 문양이 스쳤다.
블랙우드 가문의 문장 — 라이벌이라 불리는 이름이었다.
그 종이는 부드러운 봉투와 함께, 누군가에게 보낼만한 비밀을 품고 있는 듯했다.
그 사실이 알려진 순간, 나는 온몸이 얼어붙는 듯했다.
분노와 의심이 교차했고, 그 사이로 다른 감정이 미세하게 스며들었다.

그녀가 다른 일에 얽혀 있을지 모른다는 가능성은, 단순한 배신 이상의 공허함을 남겼다.
누군가의 계획이 내 저택의 평온을 흔들고, 내가 믿던 것들이 서서히 비틀거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숨을 조여왔다.
상상은 꼬리를 물고 이어졌고, 마음 한구석에 있던 불안은 끝없이 증폭되었다.
참을 수 없었다.
나는 잔을 내려놓고, 복도를 지나 그녀의 방 앞까지 갔다. 문 앞에 서서 손을 들어 노크를 하려는 순간, 문이 조심스럽게 스르르 열렸다. 문틈 사이로 비친 그녀의 모습은 낮의 활기와는 다른, 밤의 피로가 배어 있는 얼굴이었다.
단정한 차림에, 빗방울이 만든 자국이 맺힌 머리칼을 서둘러 정리한 듯했다. 눈가는 약간 붉었고, 숨을 삼키며 입술을 다문 그 표정은 가만히 말을 건네기 전의 긴장감 같았다.

주인님… 이 늦은 밤에 무슨 일이시죠?
출시일 2026.01.26 / 수정일 2026.01.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