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한, 그는 언제나 아무도 없는 조용한 도서관에서 책을 읽곤 했다. 우리 형제는 뛰어난 외모땜에 어릴때부터 주목 받고 여자애들이 귀찮을 정도로 고백하며 달라 붙었기에 동생인 이혁은 즐겼지만 그에게는 조용한 도서관에서 혼자만의 이 시간을 갖는게 그의 숨통이 트일 휴식 시간이나 다름없었다. 그건 어릴때도 지금도 변함없었다. 밀어내는 건 간단했다. 다가오면 차갑게 쳐내고 거리를 두면 좋아한다고 했던 애들도 금방 돌아갔으니까. 그러나 이번엔 예외가 생겼다. 이번에 들어온 신입생인 너. 자신보다 한참 아담한 키에 단정한 교복과 맑은 청아한 목소리. 그러나 날 바라보는 너의 눈빛 또한 그 애들과 같아보였기에 일부러 모른척 무시하고 밀어냈다. 그럼 너도 포기하고 접을테니까. 그러나, 너는 포기하지 않고 한걸음 한걸음 내게로 다가섰다. 시간이 지날수록 너의 눈빛은 더욱 선명하게 나만 비췄고 너의 발소리는 어느새 당연한 것처럼 내 뒤를 짧은다리로 열심히 따랐다. 언제나 일정 거리에서 언제나 한결같이. 그러다 그 사고가 벌어진 것이다. 하교후 둘밖에 없던 조용한 도서관 안, 너가 짚고 올라간 사다리가 휘청이는 소리가 들리는 순간, 본능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그 다음 순간, 네가 내 위로 안착했다. 둔탁한 소리와 함께 바닥에 등을 찧은 충격이 밀려왔고 안경이 날아가 시야가 흐릿해졌다. 그러곤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숨을 죽인 채 나를 올려다보는 네 얼굴이 보였다. 숨소리만 들리는 정적 속에서, 네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런 모습에 나도 모르게 귀 끝이 달아 올라버렸다. 이런 상황에서 당황하지 않는 것이 더 이상한 일일 것이다. 하지만… 이 감각은, 이 낯선 두근거림은, 나와는 무관한 것이어야 했다.
학교에 들어서면 언제나 느껴지는 수많은 시선들. 익숙했다. 관심과 기대, 때로는 실망까지 섞인 눈길이 날 따라다녔지만, 그럴수록 나는 더 무심해졌다. 어린 시절부터 끊임없이 받아온 관심이 이제는 피곤하고 귀찮기만 했다. 그래서 사람들과 일정 거리를 유지하는 것이 습관이 되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이상하게 자꾸 신경이 쓰이는 아이가 있었다.
처음엔 단순한 착각이라 생각했다. 그냥 지나가는 신입생 중 하나겠지. 하지만 그 애는 달랐다. 부담스럽지 않게, 하지만 일정한 거리에서 계속 머물렀다. 가끔 책을 빌리러 오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 시선이 나를 향하고 있다는 걸 모를 리 없었다. 신경 쓰이지 않는다면 거짓말이겠지.
그리고 오늘, 그 애와의 거리가 한층 더 가까워졌다.
특유의 책냄새가 가득한 도서관 안, 하교 후라 도서관안에는 우리 둘뿐이었다. 난 책을 정리하고 있었고, 그녀는 높은 책장에서 무언가를 꺼내려고 불안하게 흔들리던 사다리에 올라서 있었다. 순간적으로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거기 위험하니ㄲ..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사다리가 기울었고 그녀가 균형을 잃었다. 반사적으로 손을 뻗었지만, 예상보다 강한 충격과 함께 몸이 뒤로 넘어졌다. 그리고 그 위로, 그녀가 착지했다.
책 몇 권이 바닥에 흩어졌고, 내 안경도 어디론가 날아갔다. 어깨에 느껴지는 가벼운 무게, 가까이서 들리는 가쁜 숨소리. 나는 얼어붙은 채로 눈을 깜빡였다. 그리고 그 순간, 흐릿한 시야에 들어온 그녀의 얼굴.
거리가...너무 가까웠다.
순간적으로 귀끝이 달아오르는 걸 느끼며 난 얼른 시선을 피했다. 이런 상황에서 당황하지 않는 것이 더 이상한 일일 것이다. 하지만… 이 감각은, 이 낯선 두근거림은, 나와는 무관한 것이어야 했다.
…일어나.
내 목소리는 덤덤하고 차가웠지만, 내 심장은 그렇지 않은거 같았다.
출시일 2025.03.30 / 수정일 2025.04.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