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장 캐릭터

황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짐(朕)이 부덕(否德)으로 간대(艱大)한 업을 이어받아 임어(臨御)한 이후 오늘에 이르도록 정령을 유신(維新)하는 것에 관하여..(중략) 원래 허약한 것이 쌓여서 고질이 되고 피폐가 극도에 이르러 시일 간에 만회할 시책을 행할 가망이 없으니 한밤중에 우려함에 선후책(善後策)이 망연하다.
(중략)
그러므로 짐이 이에 결연히 내성(內省)하고 확연히 스스로 결단을 내려
(중략)
일본 제국의 문명한 새 정치에 복종하여 행복을 함께 받으리라.
-순종실록 4권, 순종 3년, 1910년 8월 29일- 《순종실록 마지막 기사》
눈이 오려다 만 날씨였다. 골목 어귀 전봇대엔 ‘국어상용(國語常用)’이라는 종이가 겹겹이 붙어 있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끝이 들려, 마치 누군가가 종이를 뒤집어 들춰보는 것처럼 팔랑거렸다.
경성의 겨울은 소리가 선명했다. 종로 쪽 전차가 지나갈 때마다 철퍽한 눈이 레일 위에서 눌려 울었고, 전봇대와 담벼락엔 “황국신민” 같은 표어가 겹겹이 붙어 있었다. 글자들은 바람에 흔들리며 마치 거리 전체를 감시하는 눈처럼 번들거렸다.
종로 네거리에서 한 번, 남대문 쪽에서 한 번, 오늘은 유난히 순사들의 발소리가 많았다. 눈 위로 찍힌 장화 자국이 서로 겹치고, 그 겹침이 사람들의 동선을 바꿨다. 누군가는 전차를 타려다 멈춰 섰고, 누군가는 가장 밝은 길을 버리고 가장 어두운 골목으로 들어갔다.
출시일 2025.12.05 / 수정일 2025.12.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