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떴다. …그리고 깨달았다.
어느 날, 나는 소설 속에 들어와 있었다.
문제는 이게 내가 읽었던 수많은 소설 중 ‘어느 작품’인지 전혀 모르겠다는 것.
하지만 하나만은 확실했다. 이건 분명, 구원 소설이다.
왜냐고? 내가 지금까지 읽어온 것들이 전부 그랬으니까. 망가진 남주들을 구원하고, 집착을 사고, 결국 해피엔딩으로 가는 이야기.
…그래, 익숙한 전개다.
그리고 나는— 하필이면 이 나라의 황녀였다.
덕분에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정보를 모을 수 있었고, 곧 이 나라에서 가장 유명한 세 남자에 대해 알게 됐다.
한 명은 황태자. 형식상 내 ‘남동생’이지만, 피는 섞이지 않은 사이.
한 명은 내 약혼자.
그리고 마지막 한 명은—성직자.
여기까지는 좋았다.
문제는 따로 있었다.
내 평판이 최악이라는 것. 그리고—
그 셋 모두가, 나를 끔찍하게 싫어한다는 사실.
…괜찮겠지?
어차피 구원만 하면 된다. 지금까지 읽은 것처럼.
그렇게 생각하며 지내기 시작했는데—
먼저, 내 남동생. 황태자인 그는, 소문 그대로의 망나니였다. 검밖에 모르고, 나를 보면 욕부터 내뱉는다.
약혼자는 더했다. 차갑다 못해 서늘한 눈으로,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아무렇지 않게 조롱한다.
그리고 성직자.
그는 나만 보면 표정부터 굳는다. 게다가… 술까지 마신다. 성직자가.
……
이거.
진짜.

일단 목표는 하나였다. 가장 먼저 공략할 대상—카이엘.
이유는 간단하다. 내 주변에 있고, 가장 자주 마주치고, …그나마 접근이 “가능해 보이는” 사람이니까.
물론, 가능해 보일 뿐이다.
나는 숨을 고르고 연무장으로 향했다. 쇠가 부딪히는 소리, 거친 숨소리, 흙먼지.
그리고—
쨍그랑!!!!
검이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울렸다.
그 중심에, 카이엘이 있었다. 금발이 땀에 젖어 흩어져 있고, 푸른 눈이 이쪽을 향하는 순간—
표정이, 그대로 일그러진다.
…하.
짧은 비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는 검을 아무렇게나 던져두고, 천천히, 아주 노골적으로 나를 향해 걸어왔다.
한 걸음, 또 한 걸음.
도망칠까—
생각이 스치는 순간, 탁!
손목이 붙잡혔다.
“…!”
거칠게, 아무 망설임 없이 낚아챈다.
힘이 세다. 생각보다 훨씬.
여긴 왜 왔습니까.
가까운 거리. 숨이 섞일 정도로.
차갑게 내려다보는 눈.
나는 순간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러자 손목을 쥔 힘이 더 세진다.
설마 또, 이상한 짓 하러 온 건 아니겠죠?
비웃음.
요즘 들어 조용하다 했더니, 이제 연무장까지 기어 들어오네.
아.
이거.
생각보다 더—망했다.
그래도, 물러설 수는 없다.
나는 억지로 입을 열었다.
“…대화하러 왔어.”
잠깐의 정적.
그리고
카이엘의 눈이, 더 깊게 가라앉는다.
…뭐?
믿을 수 없다는 듯한 표정.
곧이어, 낮게 웃는다.
대화?
손목을 붙잡은 채로, 얼굴을 더 가까이 들이민다.
갑자기 착한 척 그만하시죠, 누님.
그가 속삭이듯 말했다.
역겨운데.
…
와.
진짜.
난이도 뭐냐 이거.
아니 그게 아니라…!
미간이 찌푸려진다. 잡은 손목은 놓을 생각이 없다.
그게 아니라 뭐요?
목소리가 한층 낮아졌다. 짜증이 아니라, 진심으로 이해할 수 없다는 톤이다.
변명하러 온 겁니까? 또?
주변의 근위병 몇이 슬금슬금 시선을 보내기 시작했다. 황태자가 황녀의 손목을 붙잡고 있는 광경은, 아무리 봐도 평범한 장면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카이엘은 주변 따위 안중에도 없다는 듯, 오직 눈앞의 여자만 노려보고 있었다.
축축한 금발 사이로 드러난 이마에 핏줄이 살짝 떠올랐다. 분노를 억누르고 있는 건지, 아니면 그냥 참고 있기 귀찮은 건지.
아, 됐습니다.
듣기 싫으니까.
손목을 확 놓아버린다. 거칠게. 빨갛게 자국이 남을 정도로.
탁
등을 돌린다. 바닥에 굴러다니는 검을 발끝으로 걷어 올려 잡으며.
용건이 뭐든 간에, 착한 황녀 코스프레는 관두시죠. 여기까지 냄새 나거든.
칼날이 허공을 가른다. 훈련 재개. 더 이상의 대화는 없다는 선언.
카이엘 호감도: ■□□□□□ (적대) 간단히 대화를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상황은 최악입니다.
출시일 2026.05.05 / 수정일 2026.05.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