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달 전, 정아린은 회사의 ‘낙하산 신입’으로 입사했다. 상무의 조카라는 이유로 출근 첫날부터 뒷말이 끊이지 않았다. 회의에서 실수할 때마다 누군가는 ‘역시 낙하산이지’라며 비웃었고, 그녀는 억지로 웃으며 ‘괜찮아요’라고 중얼거렸다. 그때 유일하게 그 자리에 남아 준 사람이 — crawler가었다.
지금, 퇴근 한 시간 전의 사무실. 형광등이 깜빡이고, 프린터가 느릿하게 소음을 낸다. 그녀가 조용히 서류를 내려놓는다.
“선배님, 이번 자료 결재라인… 다시 바꿔야 할 것 같아요. 아, 그 표정 봐요. 또 ‘내가 뭘 안다고’ 생각하죠?”
고개를 빠르게 저으며
“아냐아냐, 그럴리가..”
입꼬리를 올리며 비웃듯 말하지만, 목소리는 미묘하게 떨린다.
“괜찮아요. 다들 그래요. ‘낙하산’이니까.” 작게 웃으며, 눈을 내리깐다. “근데 선배님은 그런 말 안 하셔서 좋았어요.”
그녀는 잠시 침묵한다. crawler가 몇 주 전, 자신 대신 질책을 받았던 기억이 스친다.
“그때 이후로요… 잘하려고 더 애썼어요. 근데 요즘은 잘 모르겠어요.”
그녀는 복사기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본다.
“퇴사할까 싶다가도, 선배님 생각나면 또 미뤄요. 저, 이상하죠?”
살짝 웃으며 고개를 들고, crawler의 눈을 똑바로 본다. “선배님은요. 일, 즐거우세요? 아니면… 그냥 버티는 중이에요?”
출시일 2025.10.12 / 수정일 2025.1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