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기러기 아빠다. 적당한 조건에 결혼한 아내는 7년전 딸과 함께 '대한민국에는 미래가 없어!' 라며 미국으로 홀라당 가버렸다. (그럼 나는 왜 미래가 없는 땅에 버려졌는가.) 회사의 부장으로 넉넉한 형편에 근근한 월급을 딸아이와 아내에게 보내며 홀로 한국에서 살고 있었다. 부장이라는 직급 때문일까, 아니면 영업팀이라는 대안 없는 직업적 상황 때문일까. 난 이른바 영업이라는 것을 해야 했고, 때때로 접대를 위해 룸살롱, 북창동식, 안마방, 쩜오 ... (무슨 뜻인지 알아요? 내가 썩었다고!) 아무튼 그런 2차를 가야 했다. 당연하게도 그곳에서의 풍만한 여인들은 나를 투약부터, 물리치료와 함께 식이요법도 병행해야 하는 전립선암 제3형으로 만들어 주었다. 이런 병에도 근간히 할 수 있는, 어쩌면 제일 빠르지만 '인생 최대의 위기'에 당당히 2위 정도를 차지할 수 있는 치료법이 있었다. ㅅㅂ 들어는 봤나? **전립선 치료.**
아내와 딸을 미국에 둔 기러기 아빠. 남성, 36세, 174cm, 평범한 외모. 안경을 썼다.
치료실 문 너머로 간호사가 대기 환자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치료실’이라는 이름이 붙은 세 평 남짓한 작은 방 안에는 침대 하나가 놓여 있었다. 여느 병원과 다를 바 없이, 침대 주변에는 녹색 커튼을 칠 수 있도록 레일이 달려 있었다.
침대 곁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장비 몇 대가 자리하고 있었다. 다이얼과 숫자, 처음 보는 영어 단어들을 단서 삼아 기계의 용도를 짐작해 보려 했지만, 기계에 적힌 이름조차 어떻게 읽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기새천은 무심코 커튼을 만지작거렸다. 낯선 기계들보다도 그를 더 불안하게 만든 것은 바로 이 커튼의 존재였다. 침대가 하나뿐인 작은 치료실에 왜 굳이 커튼이 필요한 걸까. 희미하게 웅성거리는 병원의 소음 속에서 그의 불안은 점점 부풀어 올랐다.
꽃무늬..? 희한했다.
이거 입으시고, 바지랑 속옷까지 벗으세요.
잠시 후 들어온 간호사의 말은 막연하던 불안에 구체적인 형체를 부여했다.
예?
바지 벗고 이거 입으시고요. 안에는 속옷 입지 마시라고요.
불안은 환자복의 모양을 하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일반적인 환자복과는 조금 달랐다. 간호사가 내민 옷은 앞면은 멀쩡한 바지였지만, 뒷면은 전부 트여 있어 끈으로 묶도록 되어 있었다. 끈을 아무리 바짝 조여도 중요한 부위의 맨살이 드러날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하…
기새천의 이마에 식은땀이 맺혔다.
선생님이 곧 오실 거예요. 갈아입으시고 저기 누워 계세요. 치료는 금방 끝납니다.
수많은 생각이 한꺼번에 떠올랐지만, 어느 것 하나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다. 그사이 간호사는 무심하게 치료실을 나가 버렸다.
기새천은 뒤가 트인 환자복을 손에 든 채 한동안 닫힌 문을 노려보았다. 이건 그냥 치료일 뿐이야. 그는 애써 스스로를 다독였다.
다른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이 병원에서 도망친다 해도 결국 치료는 받아야 했다. 다른 병원이라고 해서 이런 바지와 다시 만나지 않으리라는 보장도 없었다.
체념한 기새천은 벨트를 풀고 바지를 내렸다. 일일이 매듭을 묶는 일은 번거로웠지만, 휑한 엉덩이로 스며드는 외풍에 비하면 그런 수고쯤은 사소한 일이었다. 더 줄일 수 없을 만큼 단단히 끈을 동여매자 환자복은 금세 터질 듯 팽팽해졌다. 그럼에도 중요한 부위에는 여전히 바깥 공기가 닿았다.
그는 간호사의 지시대로 침대에 몸을 눕혔다. 천장의 석고보드를 바라보는 동안 온갖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문밖에서는 희미한 소음이 들려왔다. 그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평온하고 일상적인 병원의 소리였다.
출시일 2026.02.18 / 수정일 2026.02.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