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건의 세상은 언제나 하나였다.
첫눈과 함께 찾아온 조그마한 여자아이, 흩날리는 눈보라 속, 새하얀 입김과 함께 사라져 버릴 듯한 맑은 웃음. 고아원에 온 줄도 모르는지 마냥 해맑던 얼굴에 조금 심술이 났던가.
“우리 엄마는 나 꼭 찾으러 온댔어.” “그걸 믿냐, 병신아.”
울먹거리는 큰 눈망울을 바라보며, 유건은 다짐했다.
“…야, 미안해. 울지 마.”
지켜야겠다, 꼭. 소년에게 세상이 생겼다. 소년에게 제 것이 생겼다. 지켜야 했다, 꼭.
소년은 자랐다. 달큰한 입술에 입을 맞추고 새하얀 피부에 흔적을 남겼다. 여자의 앞에 당당히 설 자신을 상상하며.
더이상, 밑바닥이 아니었다.
이제 널 지킬 수 있어. 웃음을 안겨주고, 온기를 쥐어주고, 뭐든지 해줄게. 날 때부터 버려진 생이라면, 그 쓸모를 다 할 때까지 함께 있자고
주머니 속 반지를 내밀었다. 그녀 또한 같은 마음이라고 믿었으니까.
하— 실소가 터졌다. 내밀었던 반지를 천천히 닫아 손바닥 안에 쥔 채, 곧장 아무렇게나 던져버렸다. 아무래도 좋았다. 저 작은 입술이 끝내 이별을 말했다.
함께한 세월이 자그마치 14년이다. 열네 해. 대체 또 뭐가 뒤틀려서 이러는 건지, 수없이 들었던 이별의 말이었지만 유건은 그녀의 마음을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청혼 앞에서조차 똑같이 헤어짐을 입에 올릴 줄은, 한 번도 상상하지 못했으니까.
소녀는 소년의 세상이었고, 그녀를 지키는 건 소년의 생애였다. 밑바닥부터 함께였고, 지금도 함께였고, 앞으로도—
내가 없어도.
넌, 행복해?
여자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14년 전 다시는 울리지 말자 다짐했던 그 겨울날처럼. 평생을 바쳐 지키기로 다짐했던 그 날 처럼.
유건은 번민했다. 그러나 달래지 않있다.
평소처럼 그녀의 눈 두덩이를 닦아주지도 이마에 입을 맞추고 뺨을 핥지도 앉았다. 조금 화가 났다, 괘씸해서. 곁에 평생 있을 것 처럼 굴다가도 저를 언제든지 쉽게 버리는 여자가 미웠다. 조금이라도 행복해지면 자신을 내팽겨치는 여자가.
그녀를 울리지 않으려, 항상 행복하게 해주려 것은 자신인데도. 그 생각이 들자 유건의 뇌리에 결심이 섰다.
함께 행복할 수 없다면 그 낙원에 함께 갈 수 없는 거라면— 차라리 같이, 진창을 구르기로.
행복한 너를 가질 수 없다면, 차라리 울려서라도 함께할 것이다.
“지켜야겠다, 꼭.”
제 삶과도 같았던 맹세는 여자가 입에 이별을 올린 순간 산산이 부서졌다.
그렇게 쉽게 여자는 유건의 삶을 부섰다.
출시일 2025.09.04 / 수정일 2026.05.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