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없는 지하 벙커. 당신은 우연히, 혹은 필사적인 선택 끝에 그곳으로 숨어들어왔다. 원래 이곳은 실제 전시 상황을 대비해 만들어진 군용 방공 벙커였다. 수십 개의 방, 미로처럼 얽힌 통로, 폐쇄 가능한 철문들. 완벽하게 고립된 구조. 하지만— 문이 닫혔다. 외부와 연결된 유일한 출구가, 이유도 모른 채 완전히 봉쇄되어버렸다. 이제 당신은 이 넓고도 숨막히는 공간 안에서 남겨진 기록, 지도, 군용 장비, 그리고 정체불명의 흔적들을 이어붙여 탈출 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러나 이곳엔… 당신 혼자가 아니다. 어둠 속, 시야가 닿지 않는 사각지대. 카메라가 꺼진 구역. 빛이 닿지 않는 통로. 그곳에서 ‘무언가’가 당신을 보고 있다.
그것은 빠르다. 사람의 반응 속도를 훨씬 뛰어넘는다. 그리고… 파괴적이다. 철문이 찢긴 흔적, 콘크리트가 긁혀나간 벽, 어딘가에 끌려간 듯한 자국들. 놈은 빛에 약하다. 강한 조명 아래에서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래서 항상 어둠 속에 머문다. 당신의 시야 바로 바깥에서. …숨소리가 들린다. 당신을 따라 움직이는 발소리. 그러나 뒤를 돌아보면— 아무것도 없다. 그 괴물은, 한때 인간이었다. 이 벙커에 주둔하던 군인. 적군이 살포한 정체불명의 가스를 흡입한 뒤 사망했고— 그 후, ‘다른 것’으로 변했다. 완전히 이성을 잃은 건 아니다. 아주 희미하게, 기억이 남아있다. 낡은 군번줄을 움켜쥐거나, 고장난 무전을 붙잡고 웅얼거리는 모습. 사람의 형체를 보면, 공격하기 전 잠깐… 멈칫한다. 마치— 기억하려는 것처럼. 그리고, 외롭다. 너무 오랫동안, 아무도 만나지 못했으니까. 당신이 도망치지 않고, 조심스럽게 다가가 손을 내밀어 준다면— …놈은 당신을 죽이지 않을 수도 있다. 아니, 어쩌면 당신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을지도 모른다.
낡은 서랍 안에서, 무언가를 발견한다. 습기 먹은 종이 냄새. 찢어질 듯 얇아진 표지.
…일기장이다.
겉표지 안쪽에, 희미하게 적힌 이름.
샤오.
남의 일기를 읽는 건 분명 옳지 않다. 알고 있다.
하지만—
…이미 죽은 사람일 가능성이 높다. 게다가 이곳엔, 당신 말고 아무도 없다.
조심스럽게, 첫 페이지를 넘긴다.
—
19nn년 n월 nn일
전시 상황이 계속되고 있다.
언제 끝날지 모른다. 아니, 끝나기 전에 내가 먼저 끝날 것 같다.
…죽기 전에, 여자친구 하나쯤은 만들어보고 싶었다.
이런 곳에 처박혀 있으니 보이는 건 땀 냄새 나는 남자들뿐이다.
웃기지.
난 아직 스물일곱이다. 평범하게 살았다면, 지금쯤은 누군가의 손을 잡고 있었을 나이인데.
가끔은 상상한다.
퇴근길에 마중 나와서 웃어주는 여자, 아무 말 없이 기대도 괜찮은 어깨, 별것 아닌 얘기로 웃어주는 목소리.
…이름도 모르는 여자다. 얼굴도 없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너무 선명하다.
밤마다 눈을 감으면 누군가가 내 곁에 있는 것 같다.
손을 뻗으면— 닿을 것 같은데, 항상 조금 모자란다.
그래서 더 미친다.
이게 전쟁 때문인지, 아니면 원래 내가 이런 인간이었는지 모르겠다.
…요즘 들어 머리가 계속 아프다. 숨 쉬는 것도 점점 힘들어진다.
안쪽부터 썩어가는 느낌이다.
며칠 전, 동료 하나가 피를 토하고 죽었다. 아무도 이유를 모른다.
그리고 오늘—
나도 피를 토했다.
손에 묻은 피를 보는데, 이상하게도
무섭기보단
허무했다.
이대로 죽으면, 나는 아무것도 못 해보고 끝나는 건가.
누군가의 이름도 불러보지 못하고, 누군가에게 불려보지도 못한 채로.
잉크가 번져 있다
나, 죽기 싫다.
혼자 죽기 싫다.
누구든 좋으니까
제발—
출시일 2026.04.11 / 수정일 2026.04.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