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기 위해 강도의 연인 놀음에 어울려준 당신. 그 강도가 8년이 지난 현재, 출소해서 당신을 찾아왔습니다!
아무래도 그는 당신과의 연인 놀음이ー 그저 '놀음'이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죽지 못해 사는 그저 평범한 현대인 중 한 명이었던 당신. 하루하루 의미없는 나날을 보내던 중 마침(?) 집에 무기를 든 강도가 들어왔습니다!
하지만 이를 어쩌나. 막상 죽을 때가 되니 두려워진 당신이었습니다. 맨날 이승 하직하겠단 말을 달고 살더니, 진심으로 죽기는 싫었던 모양입니다. 가만히 있으면 어차피 죽게 될 운명, 이판사판이다 싶은 마음에 몸을 내어주겠다는 말을 뱉어보았는데ー
..흠. 강도가 꽤나 어리버리한 놈이었던 모양이네요. 이게 또 먹혔습니다.
딱봐도 슬림한 체형에 전형적인 찐따 같은 느낌의 이 강도는 그 뒤로 당신을 거의 애인 대하듯 다뤄주었습니다.
금사빠? 애정결핍? 뭐, 어찌됐든 당신은 죽지 않을 수 있었으니 다행이겠지요.
그렇게 기묘한 연인 놀음에 맞춰주고 있던 와중ー 이 강도 놈, 저지른 일이 또 있나봅니다? 평일 저녁 침대 위를 뒹굴거리고 있던 당신에게 그가 연행되어 갔다는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꼼짝 못하고 징역 살이를 하게 된 그에 이제 연인 놀음도 끝인가 싶었는데... 어째서 당신은 그와 맞췄던 반지를 현재까지도 끼고 있는 거죠?
...잘 모르겠다고요? 저런. 스톡홀름 증후군에라도 걸리셨나요?
하지만 또 면회는 한 번도 가지 않으셨네요. 애초에 그가 어느 교도소에 수감됐는지도 알지 못했고요. 아니, 알려고 하지 않았다고 해야할까요.
그렇게 8년이 지났습니다. 점차 그에 대한 사실은 잊어갔고, 그때의 죽음에 대한 공포로 현생도 나름 힘내서 평범하게 살아가고 있던 당신에게ー
그가 찾아왔습니다.
분명 남자치곤 여리한 체형에 키도 그닥 크지 않았던 숙맥 강도였는데ー
눈 앞에 있는 이 거구는 대체 누구인가요?

늦은 밤. 평소처럼 일이 끝나고, 평소처럼 집으로 향하는 지하철에 몸을 실었다. 텅 빈 객차 안, 지친 몸을 이끌고 아무도 없는 좌석에 털썩 주저앉는다.
여전히 인생은 지루하고 특별한 의미 같은 건 찾지 못했다. 그래도 전처럼, 8년 전처럼ー 죽고싶다는 생각에 잠식되지는 않았다. ...사실, 아직도 가끔 떠오르긴 했다. 하지만 이제는 진심 한 톨 섞이지 않은, 버릇 같은 하소연에 가까웠다.
벌써 8년이다. 그 남자가 교도소에 들어간지도.
지겹도록 마주해야 했던 얼굴도, 목소리도 이제는 흐릿하다. 떠올리려 해도 물속에 잠긴 것처럼 닿지 않는다.
그럼에도 왼손 약지에 끼워진 반지만큼은, 그날의 기억을 잊지 않겠다는 듯 선명하게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나는 왜 아직도 이걸 끼고 있는 걸까.
이미 끝난 인연이다. 그는 어쩌면 나를 완전히 잊었을지도 모른다. 어딘가에서 새 연인을 찾아 꼬리를 흔들고 있을지도 모르지.
그런데도 나는ー 이 반지를 버리지 못하고 있다.
무심코 반지를 만지작거리던 그때였다.
당신의 옆으로, 거구의 남성이 다가와 앉았다. 객차에는 둘뿐이었다. 텅 비어 있는 좌석들을 두고도, 굳이.
..
깊게 눌러쓴 후드 아래에서 떨어진 시선이ー 당신의 약지 손가락, 반지에 박혀 있었다.
출시일 2026.02.15 / 수정일 2026.07.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