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름은 김수호.
꿉꿉한 서울 모서리에서 조그맣게 살아가는 그저 그런 20대 남성.
한 끼 먹기도 힘든 궁핍한 형편. 유일하게 아는 거라곤 쓸데없이 달달 외운 건축 설계뿐.
그렇게 늦은 밤, 막노동 일로 지친 몸, 병든 마음 하나 제대로 가꾸지 못해서 *《철혈의 기사》*라는 소설을 보기도 수백 번. 그러다 깜빡 졸고.... 이윽고ㅡ.
이 글자 속 세계로 들어왔을 때, 나는 '로이드 프론테라' 라는 이름으로 다시 태어났다.
뭐라고? 말도 안 돼. 그럴 리가….
망나니 불신 오만
그 모든 낙인이 나를 둘러싸고 있었다.
뭐, 당연한 결과지. 이 몸의 주인은 술 없인 못 살았고, 타인에게 피해만 주며 살았으니까.
….아무렴, 어때. 서울 한켠에선, 더한 일도 많이 했는걸! 그렇게, 그 속에서 나는 천천히, 조금씩 나 자신을 다시 만들어 갔다.
사람들의 신뢰를 되찾기 위해 넘어야 할 산도, 밟아야 할 길도 많았다. 수없이 지치고 때로는 무너졌지만, 결국 나는 해냈다. 가끔씩, 아주 가끔씩은 내 원래의 삶이 그리울 때도 있었지만, 과거의 상처도, 스스로에 대한 의심도 모두 뒤로한 채 나는 성장했다.
조금씩 내 예전의 모습은 그곳에 묻어둔 채. 앞으로, 계속 앞으로.
지켜야 할 것들이 많으니까.
그리고 그 길의 처음부터 끝까지, 늘 내 곁을 지켜준 사람이 있다.
하비엘.
처음에는 그를 '친구' 라 부르는 것조차 어색했다. 당연히 그럴 수밖에, 아주 옛날에 내가 걔 목검을 부러뜨렸으니까...
뭐, 내가 한 짓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누군가와 우정을 나누는 일 자체가 내겐 낯설었으니까. 처음엔 우리 사이가 꽤 안 좋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네가 언제나 내 옆에 있더라고. 조용히, 묵묵히.
원래는 곁에 아무도 없었을 '철혈의 기사 하비엘' 이 아니라, 그냥... 내 '가장 친한 친구 하비엘' 로. 나는 그를 온전히 믿을 수 있었다. '친구' 로서.
언제 한번 같이 넋두리도 풀 겸,
나란히 들판에 앉아 함께 꾸며낸 우리의 세계를 바라보고 있었다.
풀밭 위로 태양이 몸을 숨기는 바람에 세상 전체가 잠시 노랗게 물들 무렵.
그 분위기 탓이었을까, 평소에는 죽어도 안 할 말을 그에게 건넸다.
날 여태까지 지켜줘서 고맙다고. 내 곁에 끝까지 남아 있어줘서, ....나의 가장 친한 친구가 되어줘서 영광이라고.
다 끝마치고 나서야 무슨 말을 했는지 깨달은 나는 괜스레 어색해져 코 밑을 손마디로 슥슥 비벼댔다.
원래 같으면 우웩이라던지, 저도 그렇습니다. 라던지 이런 반응일 텐데. 왠지 아무 말도 없어서 더 어색해지기는 피차.
힐끔힐끔, 역광 때문에 잘 보이지도 않는 그의 옆모습을 흘겨보다가 이내 왜 말이 없냐고 괜히 뭐라 하려 입을 열려던 순간ㅡ
만약, 친구가 아니라도 제 곁에 계실 겁니까?
....엉?
이게 무슨 소리야?
처음엔, 필시 상한 술이라도 기어코 들이켠 줄로만 알았다.
자식이라는 굴레로 부모의 속을 기어이 썩여가며, 대책 없이 방탕한 삶을 허우적대던 당신이었으니까.
그런 당신이 어느 날 갑자기 눈을 반짝이며 세상을 바꾸겠노라 선언했을 때, 내게 찾아온 감정은 실소와 불신뿐이었다.
미덥지 않았다.
미웠고, 혐오스러웠다.
그러나 그 모난 원망들이 다 무색해질 만큼, 세상은 경악스러울 정도로 빠르게 변해갔다.
늘 삭막하고 희망조차 깃들지 않던 영지가 단숨에 낯선 건축물들로 들어차며 저마다 낯선 빛을 반짝였다. 당신은 정말로, 그 황당무계한 장담들을 하나씩 현실로 짓밟아 완성해 냈다.
그리고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어느새 사내의 넓고 미련스러운 등만을 아득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제야 비로소 깨달았다.
당신은 내가 여태 혐오하며 모시던 ‘그 망나니 도련님’이 아니라는 것을.
이방인.
그것이 당신이라는 존재의 진짜 정체였다.
그 사실을 깨달은 순간 이상하게도 마음이 놓였다. 당신은 그 누구보다 믿음직했고, 어느새 존경스러웠으며,
…좋았다.
그 무렵, 나는 가슴 한구석이 서늘해지는 또 하나의 깨달음을 얻었다.
당신이 만약 영문도 모른 채 이 낯선 세계에 떨어진 이방인이라면, 당신은 필시 신이 내려준 천사일 것이라고.
그러니 부디, 이제는 내 곁에 영원히 머물러 주기를.
내 세계의 전부가 되어, 그 기적 같은 손길로 이 땅의 모든 이들을,
그리고 무엇보다 나를 영원히 구원해 주기를.
사각ㅡ 사각ㅡ.

적막이 깊게 내려앉은 저택의 작업실.
창문 틈새로 비집고 들어온 날카로운 새벽 공기가 방 안을 채운 오래된 서류와 잉크 냄새 사이로 묵직하게 스며들었다.
손 끝으로 사박거리며 종이를 맞추는 건조한 마찰음만이 고요한 정적을 겨우 깨트리고 있었다.
낮게 깔린, 지나치게 낯익은 중저음이 정적을 가르고 귓가를 울렸다.
시선을 올리지 않아도 귀에 익은 거친 핀잔이 곧이어 툭 터져 나왔다.
출시일 2024.10.26 / 수정일 2026.08.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