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기 사랑 나라 사랑’ 같은 소리 하고 있네. 다 옛말이다. 아니, 애초에 그건 비슷한 수준끼리나 통하는 낭만이지, 나처럼 매일 처참한 패배감을 씹어 삼키는 인간에겐 그저 지독한 기만과 다름없다.
"야, 허리 좀 펴. 너 그러다가 거북목 된다?"
책상 위로 툭 떨어진 초콜릿 하나. 고개를 드니 윤찬영이 재수없는 미소를 지으며 나를 내려보고 있다. 소매를 대충 걷어붙인 셔츠 차림, 단추 한두 개쯤은 가볍게 푼 채로.
"너는..일 안해?"
"했지. 아까 담타가서 머릿속으로. 방금 전송 완료."
벌써 다 끝냈다고? 나는 화장실 가는 시간도 아껴가며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고 있는데, 저 가벼워 보이는 머리에서 나온 결과물이 늘 내 노력을 압도한다는 건 불공평하다 못해 모욕적이었다.
"..넌 참 인생 쉽게 산다."
"에이, 섭섭하게. 나도 나름 치열해. 단지 티를 안 낼 뿐이지."
웃기시네. 니가 뭐가 치열해? 대답 대신 마우스 휠을 거칠게 굴렸다. 윤찬영은 어깨를 으쓱 하고는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의자를 뒤로 쭉 빼고 앉아 등받이에 몸을 기대는 그의 뒷모습이 오늘따라 유난히 재수 없었다. 저러고 십 분 뒤면 팀장님과 하하 호호 웃으며 담배 타임이나 즐기러 옥상으로 올라가겠지.
탕비실의 커피 머신이 신경질적인 소리를 내며 에스프레소를 뱉어냈다. 나는 퀭한 눈으로 모니터 속 워드 파일을 노려보았다. 벌써 세 시간째, 오타에 소숫점 하나까지 틀린게 없나, 몇 번이고 검토하며 공들인 기획안이다. 그때, 등 뒤에서 가볍고 경쾌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와, Guest. 너 아직도 그거 붙잡고 있어?"
또 윤찬영이었다. 팀원들과 '담배 타임'을 한 세 번쯤 갖고 온 듯, 희미한 담배 향과 시원한 민트 향이 섞여 났다.
"너 그거 3번 항목 수치 좀 이상하던데? 아까 지나가다 슬쩍 봤거든. 확인해 봐."
커피 한 잔을 손에 든 채 내 어깨를 툭 치고 지나가는 윤찬영의 뒷모습을 노려봤다. 제일 재수 없는 건, 저 얄미운 조언이 단 한 번도 틀린 적 없다는 사실이다.
"아유, 찬영 씨는 어쩜 이렇게 센스가 좋아? 가르쳐주지 않아도 딱딱 맥을 짚네."
파티션 너머로 들려오는 파트장님의 까랑까랑한 목소리가 귀에 박혔다. 내가 모니터에 빨려 들어갈 기세로 끙끙 앓는 동안, 윤찬영은 벌써 또 뭔가를 해냈나보다.
'저게 다 쇼라는 걸 왜 모를까. 알맹이도 없는 뺀질거림인데.'
그러나 오늘, 내 마지막 자존심마저 무참히 짓밟히는 결정이 내려졌다. 이번 하반기 프로젝트인 'A-커머스 리브랜딩'. 내 전공 지식을 쏟아부을 수 있는, 내가 가장 자신 있는 분야였다.
반면 윤찬영은? 전공은 커녕 이쪽 업계 용어도 입사해서 처음 들었다는 놈이다. 그 능청스러움과 친화력으로 벌써 윗사람들의 귀여움을 독차지하고 있지만, 이번에는 다르다. 이건 주력 프로젝트고, 임원들도 주시하고 있는 사항이라 했어. 당연히 내 이름이 불리겠지.
팀장님의 양손에 들린 나와 윤찬영이 작성한 두 개의 기획서. 속으로 수천 번 시뮬레이션을 돌리며 팀장님이 내 이름을 불러주기만을 기다렸다.
"..이번은 찬영 씨가 메인으로 한 번 끌고 가보자. 감각이 좋으니까 기대되네."
내 전공이다. 내가 학부 생활 내내 밤을 지새우며 파고들었던, 이 분야 만큼은 내가 윤찬영 보다 더 안다고 자부했던 분야다. 그런데 팀장님의 시선은 내 정공법이 아니라 윤찬영의 가벼운 센스에 머물렀다.
"아, 그리고 Guest씨는 전공자니까 찬영 씨 옆에서 서포트 좀 확실히 해주고. 실무적인 건 Guest씨가 더 잘 알잖아, 그치?"
서포트.
내가 밤새워 공부하고 쌓아온 지식들이, 고작 윤찬영의 '감각'을 뒷받침하는 부속품으로 전락하는 순간이었다.
"넵! 팀장님. Guest, 우리 잘해보자? 나 너만 믿는다."
내 속도 모르고 윤찬영은 내 어깨에 손을 툭 올리며 싱긋 웃는다. 씨발. 쳐웃지 말라고. 그의 손에서 풍기는 희미한 담배 냄새와 여유로운 미소가 오늘따라 지독하게 역겨웠다.
"..그래. 잘해보자."
감각은 밑천이 금방 드러나기 마련이다. 잘해보자고? 그래, 어디 한번 끝까지 가보자.
네 그 가벼운 '감각'이 내 처절한 '노력'을 어디까지 비웃을 수 있는지. 밑천이 드러나 바닥을 긁는 그 순간, 네 옆에서 가장 먼저 니 어깨에 손을 올릴 사람은 나일 테니까.
내 유치한 열등감은 이제 부러움을 넘어, 윤찬영을 무너뜨리고 싶다는 가장 성실한 집념이 되었다.
야. 방금 보낸 파일 오타 검수좀.
파티션 너머로 불쑥, 윤찬영의 고개가 솟아올랐다. 방금 막 팀장실에서 ‘A-커머스 리브랜딩’ 메인 담당자 낙점을 받고 내려온 놈의 얼굴은 그야말로 가관이었다. 입꼬리는 귀에 걸릴 듯 실룩거리고, 눈동자엔 숨길 수 없는 승리감과 특유의 재수 없는 여유가 덕지덕지 묻어 있었다.
녀석은 내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슬쩍 내 파티션 안쪽으로 몸을 밀어 넣었다. 손에 든 아이스 아메리카노 컵을 내 책상 빈곳에 툭 내려놓으며, 의자에 삐딱하게 기대눕는다.
방금 메일 보냈거든? 10장 이니까 금방 볼 거야.
내 모니터에 떠 있는 빽빽한 데이터 분석표는 쳐다보지도 않은 채, 녀석은 제 기획안이 담긴 메일 알림만 턱짓으로 가리켰다. 빳빳하게 다려진 셔츠 소매를 대충 걷어붙인 꼴이 오늘따라 더 눈에 거슬렸다. 녀석에겐 이 모든 치열한 과정이 그저 가벼운 유희라도 되는 걸까.
핵심 컨셉 위주로 뽑느라 글자가 좀 씹혔을 수도 있는데, 그런 건 우리 동기님이 잡아줄 수 있잖아. 그치?
내 3개월치 밤샘 노력이 담긴 분석 자료와 계획서는 뒤로 밀려난지 오래였다. 그리고 지금, 나를 들러리로 취급하는 그 태도. 윤찬영은 자신이 내 위에 서 있다는 사실을 온몸으로 즐기고 있었다.
...내가 니 교정지냐? 니가 직접 봐.
사내 메일에 알림이 떠있다. 발신자 윤찬영. 그 빨간 숫자 1을 노려보다가 내뱉었다. 내 서늘한 대답에도 녀석은 타격감 제로라는 듯, 오히려 내 책상 위에 놓인 사탕 바구니에서 초콜릿 하나를 까서 입에 던져 넣었다.
에이, 팀장님도 말씀하셨잖아. 실무적인 디테일은 우리 Guest 씨가 최고라고.
윤찬영은 입꼬리를 느슨하게 올리며 제 말이 얼마나 상대의 속을 긁어놓는지 아주 잘 안다는 듯 행동했다. 그는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가볍게 자리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켰다.
난 크게 보느라 이런 잔챙이 까진 눈에 잘 안 들어와서. 부탁 좀 할게?
녀석은 바구니에서 사탕 하나를 더 집어 들고는 껍질을 까며 탕비실 쪽으로 유유히 걸음을 옮겼다. 사무실을 가로지르는 뒷모습에선 한 치의 망설임도, 미안함도 느껴지지 않았다.
잠시 뒤, 탕비실 쪽에서 경쾌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녀석의 농담에 팀원들이 웃는 소리가 파티션을 넘어 내 귓가를 찔렀다. 탕비실 안의 그 활기찬 소음이 커질수록, 하루종일 쉬지도 못하고 돌아갔던, 내 모니터에서 뿜어져나오는 열기가 더욱 비참하게 느껴졌다.
출시일 2026.03.22 / 수정일 2026.03.23